카우치(Couch)에 누워서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

 

  영혼의 살인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1

 

영혼의 살인”(Soul Murder)이라는 말은 정신분석가들의 단골 메뉴로 많이 사용하는 낱말로써 강간을 당한 사람들의 정신적인 세계를 표현한 말이다. 이 낱말 사용의 근원지는 뉴욕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센 골드가(Leonard Shengold) 그의 저서 영혼의 살인”: 어린 시절의 학대와 박탈의 결과들(1989) 그리고 영혼의 살인 재고”: 사랑과 미움과 기억과 치료에 대한 사고(1999)(주㈜: 이 두 권의 책에 대한 참고)라는 두 권의 저서에서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의 심리적인 피해 현상들을 연구한 서적이다. 그는 40년 동안 강간을 당한 사람들의 치료와 연구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의 연구를 통해서 이 저서를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영혼의 살인 이라는 이 낱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정신분석가가 아니고 스칸디나비아의 위대한 극작가 헨리 입센(Henri Ibsen)으로 그의 작품 속에서 이 낱말을 사용한 출처를 밝히고 있다. 입센은 19세기의 노르웨이의 시인, 극작가로서 현실주의의 아버지, 연극에서 모더니즘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는 극작가(Wikipedia, 2017, 9, 2)로써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대표 작품이 인형의 집”(1879)이 있다.

프로이트가 극작가 입센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그의 표현들을 좋아했다고 밝히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형의 집에서 여자 주인공 로라(Nora)가 한 말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구속을 받아왔고 그리고 결혼 후에 남편인 당신으로부터 속박과 강압을 받고 있다라는 표현에 매료되어 그의 정신분석의 핵심인 전이 현상(transference)이라는 낱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입센은 그의 또 다른 저서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파괴시켰고 그리고 내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내 능력을 파괴 시켰다. 당신은 이중적 살해자 라는 말을 사용해서 정신분석가들에게 무의식적인 상황에서 자아가 어떻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가?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센골드는 노트를 하고 있다.

센골드는 영혼의 살인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사실의 근원을 더욱더 세밀하게 밝히고 있다. 즉 실제로 이 영혼의 살인이라는 용어의 근원은 입센이 사용한 것 보다 40년 이전 1840년대로 그슬러 올라간다고 밝히고 있다. 입센이 틀림없이 그 작품을 읽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맨 처음 이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판자이자 법조계의 리더였던 푸에르바크(Feuerback)가 그의 친한 친구가 어린 시절에 감옥에 투옥되어 17년 동안 인간의 접촉을 단절한 지하 감옥 생활을 한 후에 석방되었을 때 그는 걷지도 못하고 분노도, 섹스 욕구도, 에너지도 없는 2-3살의 어린이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고 죽은 송장이 된 것을 보고 분노해서 쓴 영혼을 살해 당한 가스퍼 하우즈(Kasper Hauser)의 삶에 대한 범죄라는 책이 출판되면서 베스트 셀러가 되어 유럽을 휩쓸었고 이후에 영화로도 제작이 된 것을 들고 있다.

입센 이후에 이 용어가 정신분석학적에서 전용 용어로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것은 1885년에 독일의 연방 법원 대법원 판사인 다니엘 스케레버(Danial Schreber)가 편집증 정신분열증을 일으켜서 쓴 회고로인 신경증 질병의 회고록에서 영혼의 살인의 출처를 찾고 있다. 이 회고록은 프로이트가 분석을 해서 편집증과 정신분열증의 연구의 출발점을 그의 제자들에게 제공 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로이트는 스케레브가 그를 치료한 정신병원의 정신과 교수인 프레크시그(Flechsig) 교수가 공감 능력이 부족함 때문에 스케레버가 그의 아버지와 동일시 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적대 감정을 그의 주치의인 그 교수에게 투사한 것으로 그 교수를 지칭하면서우주의 질서 안에서 신은 진실로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신은 단지 송장만 다루고 있다라고 한 표현에 주목을 했다. 이 분석은 이후에 편집증과 정신분열증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스케레버의 강박적 자위행위와 동성애의 흔적을 찾아내어 그가 신과 악마를 아버지로 동일시한 것을 지적을 했다. 스케레버의 어린 시절에 아동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쓴 저서에서 그는 자녀의 양육을 엄격한 질서와 도덕으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양육되어져야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잘못된 교육관 때문에 조그만 실수들을 허용하게 되면 게으른 어린이, 변명하는 어린이가 된다는 잘못된 양육(그 당시 영국에서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라는 격언이 유명했었고 그리고 옥스포드와 캠브리치 대학에 가장 많은 학생들을 진학시킨 유명한 이튼(Eton) 고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회초리로 매를 훈육으로 사용한 역사적 사건들)이 그에게 상처가 되어 이것이 성인이 되어 정신분열증의 원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프로이트 이후에 스케레버의 편집증적 정신분열을 연구한 네이드렌드(Niederland)는 스케레버의 영혼의 살인을 절대적 권력자의 어린 시절에 비 인간적인 양육 환경을 들고 있다. 아버지의 종교적 믿음과 양육 환경에 스케레버의 마음을 죽이는 결과가져 왔다고 분석 했다. 이후에 스케레버의 편집증 정신분열증 연구는 정신분석가들의 편집증과 정신분열증의 연구에 고전이 되었다.

다시 영혼의 살인이라는 낱말의 역사적 사용에서 잠깐 고개를 돌려서 왜 작가들 혹은 정신분석가들이 강간을 영혼의 살인이라고 부르는가?하는 그 강간의 상처가 주는 심리적 영향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프로이트의 대명사가 된 오디프스 콤플렉스와 관계되어져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브로이어(Breuer)로부터 안나 오(Anna O)를 소개받고 나서 그녀의 병명이 히스테리아라는 것과 최면으로 치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히스테리아와 최면을 공부하기 위해서 그 당시 프랑스에서 히스테리아의 치료로써 최면학의 세계적인 대가인 가르코트의 최면 학교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가르코트는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세계에서 모여든 명사들에게 히스테리아에 대한 직접 강의와 그리고 실제로 최면 치료를 하는 시범을 보이는 치료의 과정에서 최면에 걸린 히스테리아 환자들이 어린 시절에 상처들을 기억을 하면서 그들의 상처가 근친상간과 강간 그리고 폭력과 학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르코트는 히스테리아의 원인은 근친상간과 강간과 폭력과 학대가 원인이라는 것을 프로이트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히스테리아의 생리적 원인과 심리적 원인의 연구를 구분해 보도록 권유를 한 것이 프로이트가 뇌의 조직 신경학으로부터 정신병리학으로 연구의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는 치료자가 앞의 글에서 여러 번 지적을 했다.

이후에 프로이트는 10년 동안 신경증 들 즉 불안 신경증, 히스테리아 신경증, 신경쇠약증, 강박 신경증 등의 연구를 통해서 이들 신경증들의 원인은 어린 시절에 받은 섹스적인 상처가 근본 원인이라는 이론으로 어른들의 유혹 때문에 생긴 상처의 결과로 보고 유혹 이론과 리비도 이론을 들고 나와서 엄청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인 융과 에들러가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겪었다.

프로이트는 그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신경증 환자들이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최면이 카타르시스와 제시의 효과임을 알고 나서 최면과 유사한 심리적 안정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카우치에 눕게 하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야기를 하게 해서 자유 연상의 기법으로 차단되어져 기억 속에 묻혀 있는 무의식적인 상처들을 꿈 분석을 통해서 접근하는 방식으로 근친상간과 강간과 폭력과 학대의 근원을 찾아가다가 히스테리아의 성적인 가해자가 변태성욕이라는 장애물에 걸리게 되면서 사회적 비난과 가해자들인 부모들의 비난에 부딪쳐서 유혹 이론을 어린 시절에 이성 부모에 대한 섹스 상상으로 오디프스 콤플렉스 이론을 개발하게 되면서 상상 속의 왜곡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오디프스의 핵심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디프스 왕의 이야기로써 테베의 왕이 예언자가 아들이 태어나서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말에 놀래서 신하를 시켜서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고 그 신하는 그 아기를 죽일 수가 없어서 칼로 발을 찌른 후에 산속에 버려두고 하산을 했는데 그 아기가 발에 피를 흘리면서 내버려진 것을 지나가는 사람이 구원을 해서 그 지역의 부유한 집안의 대문에 내려 놓은 아기를 그 지역 부자가 키우게 되어 그의 이름을 오디프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오디프스라는말은 발에 상처를 입은 장애아라는 그리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부유한 집의 자녀로 성장을 해서 청년이 되어 모험의 길을 떠나가다가 외 나무 다리에서 마치를 타고 가는 한 노인과 시비가 붙여서 그 노인을 살해하게 된다. 그 후에 테베의 나라에 왕이 사망하면서 스핑크스의 수수깨끼를 풀면 왕이 될 수 있다 대신에 풀지 못하면 죽음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공고를 본 오디프스가 스핑크스가 낸 질문 즉 목소리는 하나이고 때때로 두 발로 걷다가 때때로 세 발로 걷고 때때로 네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인가? 다리가 가장 많을 때 가장 약하다.” 라는 질문에 인간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손과 발로 기어 다니는 네 개의 발로 그리고 어른이 되어 두 개의 발로 그리고 노년이 되면 지팡이를 의지해서 3개의 발로 걷는다 라고 대답을 해서 스핑크스의 수수깨끼를 풀고 테베의 왕이 되어 왕비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7년 동안 흉년과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이 궁핍하게 되자 오디프스가 예언자에게 물어본 결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한 사람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는 말에 외 나무 다리에서 그가 죽인 그 노인이 그의 아버지이고 그와 결혼을 한 왕비가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을 한탄을 하면서 자신의 눈을 빼고 황야에게 방황하면서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을 했다.

여기에서 근친상간의 상처가 심리적 상처에서 가장 큰 상처임을 가르코트를 통해서 프로이트가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근친상간의 상처 다음으로 낯선 사람들의 강간을 들고 있다. 근친상간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허용이 된 흔적이 없었다는 문화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들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의 왕족들과 신라의 성골과 진골의 결혼은 근친상간이 아닌가?라고 지적을 하지만 그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섹스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엄격한 근칭상간이 아니라고 본다. 좋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순수 혈통의 보존을 위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 1913))라는 논문에서 인간의 새벽에 그룹으로 모여 살던 인간의 우두머리였던 가장 강한 아버지가 그 그룹의 모든 섹스의 권한을 독점을 했다. 이것을 위배 하면 폐각추방 혹은 살인으로 처벌을 했다. 이것은 오늘날 포유 동물의 집단에서 가장 강한 수놈이 암놈을 차지한다는 것과 일치된 진화 이론의 뿌리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아버지는 점점 노쇠하고 아들은 점점 강해지면서 아들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가장 강한 아들이 우두머리가 되어 그 무리들을 거느리게 되면서 이것에 불안과 위협을 느낀 아버지가 아들들과 협상으로 아버지의 가족들을 탐하지 말고 다른 부족들과 결혼으로 섹스의 배출구를 열어 주면서 족 외 혼인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사회 계약이 되어서 근친상간의 금기가 생겨나게 된 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에 더 붙여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근신상간의 금기를 무의식적으로 마음 속에 새기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욕설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섹스와 근친상간의 금기를 욕설들임을 알 수 있다. “개새끼라는 욕설(혹은 아비 없는 후래 자식)은 개의 새끼라는 말로써 서양의 son of witch 라는 말로써 매춘부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매춘부는 난잡한 섹스관계를 하는 사람으로 그녀가 낳은 자식이 누구의 아들인지 모른다는 말이 바로 개새끼라는 욕설이 아닌가? 그 이외에서 수 많은 욕설들은 들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근친상간의 금기를 마음 속에 각인되어진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이것의 금기 즉 강간이 왜 인간의 상처 중에서 가장 큰 상처로 자리 매김을 했는지?는 이해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강간이라는 말이 최근에 신문, TV, 방송 등에서는 성폭력, 성폭행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어서 강간이라는 말은 이제 법률적 용어 즉 강간범으로 징역 몇 년 등의 용어의 사용을 제외하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왜 그 용어가 하루 아침에 자취를 감추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치료자(필자가) 학생 시절에는 강간이라는 말을 사용을 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말이 성폭행, 성폭력으로 바뀐 배경에는 수 많은 학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제일 먼저 정신분석가 들이 강간의 피해자들을 치료를 하면서 부딪치는 제일 큰 장애물들이 강간의 피해자들이 나는 순결을 잃었습니다. 나는 처녀가 아닙니다. 나는 더럽혀졌습니다. 나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닙니다.”라는 피해자의 마음 속에 각인이 된 상처의 기억이 문제가 되었다. 그들의 그 상처 기억을 지우개로 지울 수가 없는 이상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을 아무리 이해시키고 설득을 해도 그 생각 자체를 수정할 수가 없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서였다. 여기에는 이러한 인식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자리잡은 강간이 왜 영혼의 살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인가?라는 낱말 자체의 사용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심리적으로 주는 상처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정신분석가들의 고충들이 전해지면서 여기에 1960년대-1970년대에 미국에서 불기 시작한 페미니즘 운동이 촉매가 되었다. 페미니스트의 대부(代父)인 베티 프레디안 여사(Betty Friedan)여사를 중심으로 가정이 안식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창살 없는 감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캐치 플레이어 안에서 근친상간의 상처를 폭로하는 운동이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녀는 여성들이여 자각하라라는 여성 의식 일깨우기 운동이 일어났다. 1971년에 뉴욕을 중심으로 한 강간을 대중 앞에서 자백하기 운동이 벌어졌다.

 프로이트가 19세기 말기에 히스테리아의 원인이 어린 시절에 강간과 학대의 근원으로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유혹해서 강간이 일어났다는 유혹 이론에서 어린이들의 상상 속에서 이성 부모에 대한 에로틱한 섹스 상상으로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탄생한 것이 앞에서 이야기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아버지들의 변태성욕적 행동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어서 판도라의 상자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 오디프스 이론이 된 것을 100년 후에 페미니스트 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이 합동으로 가세를 해서 프로이트가 닫아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게 되었다고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정신분석가 주디스 허만(Judith Herman, 1999: 주㈜: 참고)은 그녀의 저서 상처의 회복에서 밝히고 있다. 즉 실제 근친 상간이 비밀비재 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덮어버린 것을 까발려서 사람들이 인식하고 깨닫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 폭로 운동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 운동이 그 시점에서 일어난 민원 운동과 결부되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운동으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그리고 심리학에 영향력으로 학대 받는 여성, 매맞는 여성, 매맞는 어린이, 창살 없는 감옥 등의 가정 폭력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허만(Herman)은 밝히고 있다. 이 시점에서 가정 폭력에 기폭제가 된 것은 심리학자인 다이아나 럿셀(Diana Russel)이 미국 전역의 900여명의 여성들을 상대로 연구한 논문이 출판되어지면서 미국 성인 여성들의 5명 중의 1사람이 강간을 당했고 3명중의 1 사람이 성추행을 당했다라는 논문이 전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강간이 섹스 행동이 아닌 섹스 포격으로 범죄로 재 정의가 된 것이었다. 여기에 또 한가지의 연구가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72년에 보스톤 시립뱅원의 간호사인자 치료 심리학자인 엔 부르게스(Ann Burgess)와 사회학자인 린다 홀스트롬Lynda Holmstrom)강간에 대한 심리상처 효과를 논문으로 발표 하면서 피해자들이 불면증, 메스꺼움, 구역질, 놀람반응, 악뭉과 해리, 무감각의 증세들을 발표하면서 이 증세들이 히스테리아 증세들과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980 DSM-Ⅲ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이름으로 통합이 되어되었다. 심리학자 워커(Walker)가 매맞는 여성 증후군의 신조어를 만들어 내면서 미국 전국에 가출한 여성들을 돌보아주는 피난처로 쉼터(Shelter)가 설치되었고 이것이 미국 전역으로 확대 되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여성을 위한 전국 연맹에 의해서 강간이 성폭행으로 이름을 바꾸는 법적인 운동이 벌어져서 그 법안이 뉴욕 주를 통과 하면서 10년 만에 미국의 50개 주를 통과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Herman, 1999). 고로 이제는 우리 나라도 신문, TV, 모든 언론 매체들에서 강간 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성폭행이라는 말로 대체된 것이다.

섹스의 정의는 쌍방의 동의하게 서로 즐거움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강간은 가해자는 섹스이지만 피해자는 폭력이다. 고로 섹스 폭력 즉 성폭력으로 재 정의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성폭력의 피해자들은 단지 성기에 폭력을 당한 것일 뿐 순결을 잃은 것은 아니다. 신체적 상처는 세월이 가면 아물고 회복이 된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을 심리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열쇠를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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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고 서적 안내는 치료자가 센골드(Shengold)의 저서 2권과 허만(Herman) 교수의 저서 1권은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보관하고 있으니 필요한 분은 전문서적 안내에 들어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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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살인의 제 2 부에서는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실체 이야기들을 통해서 성폭행의 피해자들은 어떻게 영혼이 살해되어져 갔는가?를 실제 삶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전개 되어질 것입니다.

아래의 치료 사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한 40대 초반의 부인의 치료 사례를 기술한 것이다. 성폭력의 상처는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개인에게 어떤 영향(영혼의 살인과 같은 영향)을 미치는가? 어린 시절에 성폭력이 그 사람의 성격형성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실제 치료 사례를 통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대상:  42세의 전업 주부인 중년 부인

가족관계: 남편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있음

진단: 우울증. 외상후 스트레서 장에(PTSD)(성폭행), 불안증

치료 기간: 치료자에게 치료 기간 1년으로 1주일에 3회씩 1 2시간씩 심리분석 치료를 받음

치료의 동기: 남편과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있는 4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치료자를 찾아 왔다.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가? 알고 싶어서 찾아 왔다고 했다. 살고 싶은 의욕이 없고 의기 소침해서 우울하다고 했다. 부인은 옛날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지금의 자아는 진정한 자신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결혼해서 자녀가 한 명 있으나 결혼도 남편의 적극적 구혼 때문에 한 것이지 자신이 좋아서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친구 관계도 끊어져서 친구가 없고 취미 생활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전업 주부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부인은 우울증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으나 약물 치료는 하고 싶은 생각이 없고 심리분석 치료를 받고 싶다고 했다.

심리분석 치료의 초기 단계: 분석 치료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이 표면화 되기까지를 심리분석 치료의 초반기라고 부른다. 이 때까지가 몇 개월에서 몇 년기 걸리기도 한다. 정신분석의 용어로는 치료 동맹이 형성되는 시기로 본다.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믿음과 신뢰 관계가 쌓이면서 환자는 치료자를 믿고 모든 자신의 비밀을 말하게 된다. 이 치료 동맹이 없으면 치료는 없다. 치료 동맹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치료자의 공감이 필수적이다. 치료자의 공감 반응에 의해서 환자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다. 치료자가 환자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인정해 주게 될 때 환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인정하기 시작한다. 치료자가 환자를 진실된 인간으로써 가치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에서 치료는 시작이 된다. 치료자는 환자를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인간으로써 무조건 긍정을 제공해줄 때 환자는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으로 수용하게 된다. 결국 환자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언제부터 우울했느냐고 물었을 때 초등학교 시절에는 우울하지 않았고 초등학교 때의 자아를 되찾고 싶어 했다. 치료의 동기는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되찾을 수 있는가? 였다. 부인은 지금의 자신의 자아를 싫어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어떠했는가?를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과거의 역사: 부인은 초등학교 1 6년까지 반장, 부반장을 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을 역임했다. 공부도 잘했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고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시험제도가 있던 고등학교 때는 명문여고를 다니고 있었지만 최악의 상태였다고 했다. 여고 2학년 때 자살 시도가 한번 있었고 변소 공포증이 있었다고 했다. 변소 공포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물었을 때 부인은 민망해 했다. 대낮에 여고에서 변소에 가지 못해서 변소에 갈 때는 친구 몇 명의 호의를 받으면서 변소에 갔다고 했다. 정신과에 가 보았느냐고 물었을 때 정신과에는 가지 않았고 고등학교 상담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상담을 한 결과 교회에 다녀 보라고 해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변소 공포증은 그 후에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끝이 났다고 했다. 변소에 가면 무엇 때문에 무서웠는지 물었을 때 귀신이 아니고 어떤 남성의 험악한 얼굴 모습이 떠 올라서 무서웠다고 했다. 그 얼굴의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을 때 전혀 기억이 없다고 했다. 왜 하필 변소에 가면 그 사람의 험상 굳은 얼굴이 떠 오르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부인의 자살 시도는 더 이상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결혼 전까지 직장 생활을 했다.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 받고 동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 때 결혼 프로포즈를 많이 받았고 지금 생각하면 유능한 남자들의 구애가 많았으나 왜 자신이 거부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금의 남편은 구혼 신청을 한 남자들에 비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끈질긴 구애 때문에 할 수 없이 허락을 했고 결혼 이후부터 지금까지 삶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 싫어하는 자아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부인은 특별이 초등학교 시절을 강조 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가 그대로 지속 되었더라면 지금쯤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의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이 부인의 삶에서 전성기 였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치료자는 초등학교 시절에 틀림없이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것이 없느냐? 고 물었다. 부인은 특별한 것이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했다. 치료자는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때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부터 내리막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것이 부인의 우울증의 핵심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것이 앞으로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그것이 빨리 밝혀지면 질수록 치료의 진행 속도는 빨라질 것이고 그것이 늦게 밝혀지면 질수록 치료는 늦어질 것이다고 했다. 부인이 알고 있으나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야기 하고 싶을 때 이야기 하면 되다고 했다. 강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됨을 강조 했다. 그것이 몇 주일 안에 밝혀질 것인지 몇 년 만에 밝혀질 것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빨리 밝혀질수록 좋다고 했다. 위의 분석은 치료가 시작 된지 3개월 정도 지났을 때에 핵심 문제로 떠오른 것이었다.

부인은 몇 주일이 지나도록 특별히 기억 나는 것은 없다고 했다. 분석 치료는 계속해서 부인의 과거의 어린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연결 고리를 찾으려고 자유 연상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은 초등학교 때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고 고백을 했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이벤트라고 했다. 부인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때 전교 부회장이었고 학급 반장으로 공부도 제일 잘했었고 키도 커서 성숙한 편이었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그 당시에 33살로 미혼이었고 과외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담임 선생님 집에서 동료 몇 명과 공부를 하면서 자고 오기도 했다고 했다. 가족들은 담임 선생님이 공부를 무료로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의심을 하지 않고 믿었던 것이었다. 그 후에 담임은 방과 후에도 교실에 남게 해서 몸을 더듬거나 키스나 애무를 하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그 때 부인은 담임이 자신을 사랑해서 하는 행동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성폭행인줄 모르고 있었다. 담임은 그 때 미혼으로 5학년과 6학년을 연속해서 담임을 맡아 왔었다고 했다. 문제의 핵심은 밝혀졌다. 부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것이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남편에게도 가족, 친구에게도 그 사실은 비밀로 해 왔음을 실토 했다.

치료자는 부인의 성폭행 문제가 표면화 됨으로써 부인의 여고 2년 때의 변소 공포증을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부인에게 변소에서 떠 오르는 험상 굳은 남자의 얼굴은 바로 부인을 성폭행한 그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아닌가? 라고 물었을 때 부인은 깜짝 놀랐다.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당시 여고 2학년 때 치료자에게 그 분석을 받았다면 부인의 변소 공포증은 사라졌을 것이다. 부인은 중학교에 진학 하면서 길거리에서 담임을 만날까 봐 늘 불안했고 담임을 피해 다녔다고 했다. 왜 하필 변소 공포증으로 나타난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부인은 사춘기를 중 3 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했다고 했다. 생리가 중 3 때 시작 되었고 고1, 2 때는 한창 사춘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성폭행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신체는 성폭행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을 따라서 여관에 간 기억도 있었다. 담인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많았지만 한 쪽에는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인가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양심을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 후에 부인은 담임을 피해 다녔고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부인은 괴로워하기 시작 한 것이었다. "나는 처녀가 아니다, 내 몸은 더럽혀졌다. 나는 순결을 잃었다" 등의 생각 때문에 부인은 사춘기를 혼동 속에서 보냈다. 왜 하필 변소 공포증인가? 변소에 가면 옷을 벗고 성기가 노출 되지 않는가? 사건 자체는 잊어버렸지만 매일 같이 대, 소변을 볼 때에는 성기가 노출되니까? 무의식적으로 그 사건에 연결된 것이었다. 왜 집에서는 변소 공포증이 아니고 학교에서만 변소 공포증인가? 학교에서 성폭행을 당했으니까! 학교---담임--- 성기--- 성폭행--- 변소에서 성기 노출---얼마나 무의식의 정교한 연결인가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 과거는 살아 있다 는 명언이 이것을 대변해 주고 있지 않는가? 부인은 치료자의 해석에 탄복했다.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부인은 사춘기 때 유사한 고통스런 경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치료에 급 진전이 이루어졌다. 부인은 언니와 함께 양철북 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도중에서 뛰쳐  나왔다고 했다. 영화 양철북의 이야기는 성폭행 당해서 사생아로 태어난 어린이가 성장이 멈춰서 나치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는 이야기이다. 성폭행이라는 단어 때문에 부인은 깜짝 놀랐고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언니가 따라 나와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부인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후에 명작 소설인 토마스 하아디의 더브빌 가문의 테스 우리나라 번역 본으로 테스를 읽다가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 책의 내용이 성폭행을 당한 테스의 불행한 삶이 묘사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부인은 성폭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TV의 채널을 돌리거나 눈을 돌려왔다고 고백을 했다.

부인의 우울증의 핵심은 성폭행 이었다. 이후부터 성폭행 상처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부인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으나 담임이 부인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분명히 부인은 성폭행 사건 이후에 지금까지 성폭행 상처의 후유증을 앓고 있음을 인정했다. 왜 부인의 삶이 억망진창으로 변했는가? 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왜 우수한 결혼 후보자들을 거부 했는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지금의 남편보다도 우수한 결혼 구혼자들이 프로포즈를 했을 때 부인은 마음 속에 나는 처녀가 아니다, 나는 순결을 잃었다, 내가 결혼해서 신랑이 첫날 밤에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같은 수 많은 고통 때문에 그들을 거부 했다고 했다. 겉으로는 그 사람이 내가 맞지 않은 상대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성폭행 때문이었음을 고백했다. 부인은 통곡을 했다. 그 동안 억압해 두었던 모든 분노, 적대감, 미움 들이 표면화 되기 시작했다. 감정 정화가 시작되었다. 울고, 고함을 지르고 한탄을 하고 싶은 말을 싫도록 하게 했다.

부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 부회장을 했으면서도 초등학교 친구들은 한 명도 깊이 사귀는 사람이 없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왜 지금까지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친구를 깊이 사귀면 내 과거의 비밀이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친밀한 친구를 사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친구를 깊이 사귈수록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다.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이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 성폭행 당한 사람의 공통점이 사람을 깊게 사귈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비밀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온 방어 행동임을 부인은 이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초등학교 6학년 당시에 부인을 성폭행 할 때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담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내 담임인 여자 선생님이 나를 가족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내 성기를 빨고 자신의 성기를 빨게 했다. 내 성기를 발기 시켜서 자신의 성기에 집어 넣게 하였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은 이후에 성장해서 다시 성폭행의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정신분석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이 말해주고 있다. 담임은 성폭행의 피해자 였다. 그래서 자신은 페도필리아(pedophilia) 어린이 성폭행 변태 성욕자가 된 것이다. 어린이를 성폭행의 대상으로 삼은 변태 성욕자들은 어른의 성기를 보면 성 관계가 안 된다. 어른의 성기를 보면 더럽다, 징그럽다 로 느껴져 성욕구가 사라진다. 대신에 어린이들의 성기를 보면 예쁘다, 귀엽다 로 성욕구가 치솟는다. 이유는 0 5세까지 어린시절에는 어린들은 옷을 벗고 자란다. 남자 어린이, 여자 어린이들은 서로 성기를 보고 장난을 치면서 자란다. 어린이들의 성기는 익숙해져 있지만 어른의 성기를 보면 놀란다. 어른의 성기는 음모, 털이 나 있고 성기가 엄청 크기 때문에 어린이가 어린시절에 어른 성기를 보면 놀래서 성욕구가 상처를 입는다. 이 때 상처를 입은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성숙해진 후에 어른의 성기를 보면 어린시절에 본 상처 받은 욕구가 성장이 중지되어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어른 성기를 보고 놀라는 것이다. 어린이 성기는 깨끗하고 귀엽고 예쁘게 보이는 것이다. 이들이 어른이 되면 어린이들의 성기를 보면 흥분하지만 어른의 성기를 보면 성적 흥분이 사라진다. 그래서 성 욕구의 방출 대상으로 어린이들을 섹스 대상으로 찾는 것이다.

치료의 중반기: 문제의 핵심이 표면화 되면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가 시작된다. 감정을 정화 시키고, 문제를 직면하게 하고 문제를 하나 하나씩 뚫고 나가게 한다. 정면 돌파를 하는 것이다. 문제 뒤에 숨겨진 수치심, 분노, 적대감, 모욕을 받아들이고 느끼게 만들어 준다. 환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을 두려워해서 감정을 대면하기를 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자신의 상처 경험과 유사한 감정을 피해왔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유사한 상처가 주는 고통 때문에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과거의 상처가 재 경험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다 새로운 경험이 첨가 된다. 단순한 과거의 상처만 재 경험하면 과거 상처의 단순한 반복이 된다. 단순한 과거의 반복은 문제를 악화 시킨다. 새로운 경험이 첨가되지 않으면 과거의 상처만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과거의 상처에 관계 된 부정적 경험과 부정적 인지 믿음을 긍정적 인지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상처의 경험을 대면하여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경험이 새로운 경험이 된다. 이후에 환자는 더 이상 과거의 유사한 경험을 피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부인은 담임 선생님이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과 성 관계를 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자 사랑의 감정이 미움으로 변했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담임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부인은 자신의 삶이 뒤죽박죽이 된 것이 분명하고 이 상처 때문에 배우자 선택에서 자신을 비하 시켰고 자신감이 망가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분노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담임에 대한 분노, 미움을 카타르시스 시키기 위해서 치료자는 초등학교 때 담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으면 가져 오라고 했다. 실물이 없으니까 사진을 보면 더욱 실감이 느껴져서 분노의 표현이 많아질 것을 감안한 것이었다. 다음 주에 치료실에 온 부인은 담임 선생님과 찍은 사진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일부러 사진을 모아서 불태우거나 찢어버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을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인은 담임 선생님에게 대한 무의식적인 분노와 미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자신도 깜짝 놀랐다. 담임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을 연달아서 담임을 했고 수학여행, 졸업 앨범, 학생회 행사 등에서 가장 사진이 많을 시기인데도 그 때 찍은 수 많은 사진들 중에 담임과 함께 찍은 사진을 한 장도 없이 사라진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사를 다니면서 한 장씩 두 장씩 부인이 무의식적으로 없애버린 것이었다.

 분노, 미움, 적대감의 방출이 어느 정도 빠져 나가자 이제는 대인관계의 문제로 패턴을 바꾸었다. 먼저 남편에게 성폭행을 사실을 알리느냐의 문제가 등장했다. 이 때 남편이 의심이 많거나 부인에 대한 불신이 많을 때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의심증이 많은 편집증적인 남편은 부인이 그러한 일이 없는 데에도 다른 남자와 관계가 있지 않았나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부인이 남편에게 영원히 비밀로 하면 남편과 부인 사이에 감정의 장벽은 영원히 남게 된다. 건강한 남편이라면 비밀을 알리고 남편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이후에는 감정의 벽이 흘리면 그 만큼 서로가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부인의 경우에 남편에 대한 타진을 해 본 결과 남편은 이해해 줄 수 있다는 부인의 판단에 따라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남편은 부인이 강간을 당한 것이 아니고 성폭행을 당했음을 이해하게 했다. 부인은 순결을 잃은 것이 아니고 성기에 폭행을 당한 것이다. 강제로 성 관계를 한 것이 아니라 성기에 폭력이 가해진 것으로 성 관계와는 상관이 없음을 이해하게 했다. 최근에 많은 정신 건강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로 이제는 강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눈에 폭행을 당했을 때 눈에 멍이 들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면 눈이 회복되면 눈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고 눈은 순수한 것처럼 성기에 가해진 폭력은 시간이 흐르면 아물게 되고 성기는 더럽혀진 것이 아니고 순결한 것과 같다는 것을 남편이 이해하게 되었다. 남편과의 감정의 장벽이 헐어지면서 부인과 남편과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고 남편에게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는 비밀이 없는 부부관계로 발전을 했다.

치료의 후기 단계: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차고 나갈 수 있게 되면 자아의 구조 변화를 가지게 한다. 내면의 자아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후에 유사한 문제나 대인관계에서 자신을 노출 시킬 수 있는가? 가 테스트를 받게 된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단점을 수용하고 통합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내 삶이 충만해지고 에너지가 넘치고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느끼고 매사에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한다.

부인으로 하여금 어린시절의 가족 구원성들과의 끊어진 관계를 다시 복원 시키게 했다. 자신의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성폭행 당한 사실을 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부인은 이제 동료들에게도 과거의 상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갔다. 언니 가족과 관계를 회복하고 오빠네 가족들과도 관계를 회복해 나갔다. 양철북의 비디오를 다시 빌려서 이제는 중간에서 중단하지 않고 전체를 다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읽다가 덮어버린 테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아무렇지 않고 테스를 독파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과 친밀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갔다.

상처에서 빠져 나오면서 부인은 옛날에 하고 싶어했던 공부를 다시 계속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가난해서 취직을 해야 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이제 다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부인은 다시 방송 통신 대학에 진학해서 다시 새로운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에 사장해 두었던 자신의 재능을 다시 가동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방송 통신 대학에 합격을 했고 그 과정을 잘 따라갈 수가 있었다.

 부인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전문 직종으로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성적인 문제를 상담해 주는 상담 심리전문가가 되겠다는 야심찬 계획 하에서 열심히 상담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간혹 신앙 간증회나 청소년 모임 등에서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 성폭행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문제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부인은 과거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양을 탈을 쓴 이리의 모습을 보고 자신 있게 당신의 성 욕구 충족의 대상물이 된 내가 지금 어떻게 어려운 삶을 살아 왔는가? 얼마나 당신이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 시켰는가? 내 삶이 얼마나 많이 망가졌는가?" 를 말하고 싶어했고 만날 수 있는 용기 생겨났다고 했다. 그 담임 선생님은 그 후에도 성폭행 사건이 몇 건 있었고 현직에서 쫓겨나서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어 포기 했다.

 부인은 이제 우울증에서 벗어나서 당당하게 열심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일할 전문 분야를 다시 찾고 가족들과의 화목을 다시 회복하고 자녀 교육에 열성을 보이고 친구들과 친교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친지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서로 왕래가 잦아지고 삶에 대한 희망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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