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치(Couch)에 누워서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

 

 

프로이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사실 3

다시 읽은 프로이트(Freud)  

 

뇌 조직학적인 신경학자로부터 히스테리아와 최면학으로 전환 -

앞에서 밝힌 것처럼 프로이트는 대학 3학년 때 크라우스(Claus) 교수의 동물학 연구소에서 연구 조교로 시작했을 때 철저한 현미경 해부학자로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해 부케(Brucke) 생리학 연구소에서 6년간 연구 조교로 일을 하면서 철저한 실험 생리학과 해부학자가 되었고 이후에 비엔나 종합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서 메이네트(Meynert)의 뇌 해부학 연구소에서 철저한 뇌 조직학적인 신경학자가 되었다. 크라우스, 부케, 메이너트 교수들은 독일 물리학계의 대표자인 헤몰츠(Helmholtz) 학파의 후계자들로써 실증주의적인 실험 물리학자, 실험 생리학자, 실험 해부학자들로써 그 당시에 해양 동물학, 생리학과 뇌 과학에서 세계적인 귄위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그의 지도 교수들이 그들의 후계자로써 양성해 놓은 실험 생리학, 뇌조직 신경학자로써 키워놓은 제자인 프로이트가 그들의 스승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심리학자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을 소개를 하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심리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는 그보다 14살이 많은 죠셉 브로이어(Josef Breuer)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스승인 부케와 메이네트를 브로이어(Breuer)가 대신하게 되었다고 프로이트의 전기 작가인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은 지적을 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첫째 딸의 이름을 브로이어의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막내 딸은 브로이어의 사위의 이름을 따서 이었다는 것은 프로이트가 얼마나 브로이어를 존경하고 따랐는지?를 설명해준다.

브로이어는 독일의 철저한 헤몰츠 학파의 신봉자였다. 동시에 그는 문학적인 그리고 심리학적인 면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괴테(Goethe)와 페크너(Fechner)의 지지자였다. 그는 부유한 유태인으로 프로이트에게 든든한 지지자였고 후원자였고 프로이트에게 새로운 학문인 히스테리아와 최면학을 소개시켜준 장본인이었다. 프로이트는 그의 자서전에서 브로이어를 스승이자 아버지이자 선배이자 친구로써 자주 노트하고 있음을 존(Jones)이 지적을 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대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70대로 노인이어서 경제적인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면서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 조교로써 생활하면서 학비와 생활 비용을 조달 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면 때문에 연구 조교 생활을 한 것은 이차적인 부수적인 것이고 그는 연구를 하는 것에 어린 시절부터 흥미가 있었고 그는 연구소 생활을 선천적으로 좋아했고 개업의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소망한 대학 교수 자리는 이미 선배들이 자리를 차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들어갈 틈이 없어서 지도 교수인 부케의 권유로 개업 의사의 길을 걷기 위해서 비엔나 종합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그는 대학 입학 후부터 대학 3년 이전까지는 주로 친한 친구들과 동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돈을 빌리고 갚아주는 방식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프로이트가 브로이어를 만나게 된 것은 부케 해부학 연구소를 통해서 그 시점에서 브로이어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간간히 받았다. 그가 레지던트 4 년을 끝내고 의과 대학에서 처음으로 우수한 레지던트들을 3명의 선발해서 해외 연수를 6개월간 지원을 해 주는 모집에 응시를 해서 파리에 유학을 갈 때 브로이어에게 부족한 경제적 지원을 요청을 했다. 유학 장학금은 전액이 출발 직전에 제공되는 것이 아니고 3분의 1은 해외 연수가 끝나고 지원을 해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브로이어가 지원해준 것이었다. 그 이외에서 프로이트는 어려울 때마다 브로이어를 찾아갔다.

브로이어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학문적인 뛰어난 재능을 가진 행운아로 프로이트가 기술을 하고 있다. 그는 대학 교수의 제의를 거부하고 개업 의사로써 비엔나에서 명의로 소문이 나 있었고 해부학 연구 소장인 부케(Brucke) 교수와 그의 후계자인 프로이트의 선배인 엑스너(Exner)와 기타 여러 명의 유명 인사들의 가족 주치의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2년 전에 브로이어가 히스테리아의 고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안나 오(Anna O)라는 히스테리아 환자를 최면으로 치료를 2년 동안 치료를 하고 있었고 프로이트가 안나 오에 대해서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브로이어는 간간히 프로이트의 집을 방문해서 프로이트와 최면학과 히스트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자주 했다. 브로이어는 자신의 치료 방법을 카타르시스라는 감정 방출로써 이론화했고 이 전문 용어는 바로 안나 오와 치료 과정에서 그녀가 이 방법이 굴뚝 청소라고 표현한 것을 브로이어가 수용할 하면서 그의 핵심 치료가 감정을 방출하는 에너지 방출로 이론화했고 이것을 프로이트와 자주 토론을 했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이미 파리로 떠나기 2년 전부터 브로이어로부터 최면과 히스테리아에 대한 정보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이것이 파리에 유학 생활을 한 6개월 동안에 결정적으로 프로이트가 가르코트(Charcot)라는 세계적인 최면학과 히스테리아의 대가를 만나게 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신경 생리학과 뇌조직 신경학자로부터 히스테리아와 최면학으로 프로이트의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뀌게 되는 결정적인 계가가 되었다고 어네스트 존이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전기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프로이트가 파리를 유학 목적지로 선택한 것도 이미 그는 히스테리아와 최면학에 흥미 때문에 그 당시 히스트레아의 최면 치료로 세계적인 권위자인 프랑스의 가르코트(Charcot)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가르코트를 만나는 그 순간에 그는 가르코트의 성격과 학문적인 태도와 학자로써의 길을 걸어가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가르코트라는 인물에 매료되었다고 프로이트가 스스로 밝히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의 삶에서 가장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스승으로써 부케와 브로이어를 대신했던 인물이 바로 가르코트라고 자주 밝히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6개월의 해외 유학을 파리로 선택을 했고 그가 출발해서 1.5개월을 신혼 여행지에서 부인 마샤(Martha)와 함께 보낸 것을 빼면 실제로 가르코트와 함께 한 시간은 4.5개월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르코트가 프로이트에게 심어준 것은 히스테리아”(hysteria)라는 제목으로 이것이 그에게 혁명적인 제목이 되었다고 존(Jones)은 프로이트의 전기에서 그가 한 말을 인용을 했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가 2년 동안 치료를 한 안나 오(Anna O)양이 이후에 치료 종결 후에 재발을 한 것과 그리고 그가 최면학인 카타르시스의 방법이 치료 초반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종종 후반기에 재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최면학이 히스테리아의 치료에 결정적인 치료 기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증세 뒤에는 수많은 비밀들이 숨어있다. 그 비밀의 역사적인 흔적을 추적해 가야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다는 그의 목적론이 확신을 얻게 된 것이 이후에 바로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을 하게 된 계가가 되었다. 그가 파리를 방문하고 비엔나로 돌아와서 그는 결정적으로 남성 히스테리아의 사례를 연구하게 된다.

그 당시에 히스테리아(hysteria)는 그리스 시대에 히포크라테스가 명명한 병명으로 그리스 어로 hyster는 자궁이라는 뜻으로 자궁이 돌아 다니면서 병을 일으킨다고 히포크라테스가 정의를 한 것 그대로 인식되어 히스테리아를 쥐오줌풀(지독한 냄새가 나는 약초)을 복용하게 해 오던 것을 가르코트가 최면 치료로써 히스테리아를 치료하게 되면서 히스트레아의 원인은 어린 시절에 강간과 신체적 학대로 기원한다는(심리적 요인) 것을 프로이트가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프로이트는 비엔나에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그가 가르코트의 살페트리에(Salpetriere) 병원에서 최면으로 치료를 시도한 한 철도 회사 근무에서 부상 당한 한 남자 히스테리아 사례를 연구해서 귀국 보고서로 비엔나 의학학회에 유학 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메이네트(Meynert)뇌 과학 연구소에서 뇌의 조직학적인 연구로 신경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카소위츠(Kassowitz) 어린이 연구소에 1주일에 3일간 연구 교수로 어린이들의 반신 마비, 반신 장님 등을 연구를 하고 있었고 동시에 개업으로 주로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 그의 신경증 환자의 치료는 주로 전기 쇼크 치료와 마사지 목욕 그리고 휴식적인 방법을 혼합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파리를 방문하고 나서 그의 지도 교수인 메이네트 교수는 프로이트가 이상한 제시와 체면에 매혹되어 가르코트 밑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에 대한 분노로써 프로이트가 귀국했을 때 그의 실험실 근무를 제외시키고 그의 신경학 연구 논문에 접근을 차단시켜버렸다. 프로이트는 고립되어 겨우 가소위츠 어린이 연구소에서 신경조직의 상처로 인한 반신불구 등의 관심으로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메이너트(Meynert)는 프로이트와 최면학의 열풍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그는 그가 실험과 실증주의의 과학적인 지식으로 무장시켜서 의사라는 전문인을 양성해 놓은 일부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신경조직과 정신의학에 반대로서 과거로 퇴행을 하고 있는 최면학과 제시와 같은 마술적인 주술로(최면에 걸리는 과정을 은유적 표현) 사람을 현혹시키는 길을 가고 있다라고 프로이트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프로이트를 과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뇌의 신경조직학을 연구해 오면서 신경 손상으로 반신불구 즉 중풍이나 반 장님과 반쪽 불구는 신경학의 일부분이고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심리적인 불구와 마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후자의 연구 쪽으로 방향이 이미 파리의 방문 이후에 확정되어 있었다. 그는 메이네트(Meynert)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핍박과 고립 고사 작전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가 가소위츠(Kassowitz) 어린이 연구소에 그가 발견하고 연구를 하게 된 것은 마비와 무감각이었다. 무감각은 마비보다 흔했고 무감각은 신경 조직에 이상이 없는 심리적인 상처들과 관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최면학의 약점이 바로 카타르시스로써 재발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최면에 걸리지 않는 반쪽 치료라는 것을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최면에 깊게 만족 할만 하게 최면에 걸리지 않음을 알고 이것에 대한 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연구로 뛰어들게 된 것이 정신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메이네트의 지도 교수의 연구실에서 쫓겨난 프로이트는 개업 일과 가소위츠 어린이 연구소에서 어린이들의 반쪽 마비와 무감각을 연구를 하면서 가르코트의 강의 책 2권과 과 베른해엠의 최면학 교과서 2권을 프랑스어에서 독일어로 번역을 해서 출판을 하는 일을 하면서 히스트레아와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는 이미 파리에서 가르코트로부터 조직학적인 마비(생리적인 상처로 인한 마비)와 히스테리아적인 마비(심리적인 마비)의 비교 연구를 제의를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었다. 그는 마비는 무감각으로 이어지는 지름길로써 무감각은 주로 신체의 일부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심리적인 원인으로 마비가 온다는 것을 확정 짓고 있었다.

그가 파리에서 귀국 후에 유학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귀국 보고회에서 연구 제목이 남성 히스테리아 연구의 치료사례였고 그의 연구에 대한 논평을 비엔나에서는 시들했고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노트하고 있었다. 이미 히스테리아는 여성만 걸린다는 여성 질병으로 각인된 인식을 프로이트가 깨부수려고 시도를 했으나 비엔나에서는 아무도 그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프로이트는 가르코트의 파리 방문 4년 후에 다시 파리에서 최면학의 양대 라이벌로써 가르코트에 필적하고 있던 베른헤임(Bernheim)과 라보(Liebault)의 낸시 학교(Nancy School)를 방문해서 그 당시에 의과대학 교수로써 괴짜 의사가 무료로 치료를 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고 최면학 교과서를 쓴 사람이 베른헤임이었다. 그는 가르코트가 최면으로 조교들의 팔을 무감각 상태로 그리고 최면을 풀어서 감각으로 되돌아오는 실험을 통해서 최면학 = 히스테리아라고 정의를 한 것에 반대해서 최면학은 정신병이고 마비는 최면의 제시로 생긴 것임을 지적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 반대가 되는 이론으로부터 가르코트를 그가 운영하는 살페트레에(Salpetriere) 병원의 살페트리에 학교 혹은 가르코트 학교(Charcot School)과 후자를 낸시에 거주하고 있는 라보의 이름을 따서 낸시 학교(Nancy School)로 이름을 따서 서로 대립으로 경쟁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가르코트 방문 후 4년 만에 다시 낸시 학교를 방문하고 최면에 대한 지식을 교환하고 그들의 최면 치료를 연구하게 된 것이 정신분석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프로이트는 베른헤임이 최면을 걸어서 치료를 한 여성 환자가 최면 후에 깨어나서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상식을 깨도 베른헤임이 그녀에게 몇 가지 실마리를 주면서 기억해 보라고 했을 때 최면의 기억 상실을 기억을 하는 것을 관찰하고 목격하고 나서 이후에 이 방법을 최면이 걸리지 않는 방법의 대안으로 고안하게 된 것이 정신분석의 탄생이 되었다.

드디어 1895년에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의 공동 작품으로 히스테리아에대한 연구들”(Studies in Hysteria)의 출판으로 브로이어의 안나 오(Anna O)의 치료 사례와 프로이트가 2명은 최면으로 그리고 2명은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의 치료의 과정을 발표 하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된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가 소개한 4명이 히스테리아 환자들 중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최면으로 치료를 한 사람이 프라우 에미(Frau Emmy)(가명)었다. 그 다음에 최면이 아닌 방법으로 치료를 한 사람에 엘리자벳(Elisabeth von R)(가명)이었다. 프로이트는 그녀가 최면에 잘 걸리지 않는 것을 보고 베른헤임이 사용했던 방법으로 그녀를 카우치에 눕게 하고 눈을 감게 하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가 대고 가볍게 누르면서 기억을 잘 나게 될 것이라고 그녀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이야기를 해 주면서 머리 속에 생각이 나는 것을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고 그녀가 이야기를 순서 없이 머리 속에 떠 오르는 생각들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프로이트가 그녀를 제지를 하자 그녀가 짜증을 내면서 생각이 끊어진다고 불평을 한 것을 프로이트가 수용을 해서 자연스럽게 계속 이야기를 하도록 허용해준 것이 바로 자유 연상(free association)이라는 정신분석의 치료 기법으로 발달하게 된다. 그는 그녀를 치료를 하면서 히스트레아의 치료는 환자와 치료를 하는 의사의 개인적인 관계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최면학에서 라포, 래포(rapport)로 그리고 이후에 정신분석에서 치료 동맹, 작업 동맹으로 발전)는 것을 알고 있었다.엘리자벤의 사례는 1886년에 드디어 최면을 포기하고 심리분석이라는 최초의 출발이 되었다고 존(Jones)는 밝히고 있다.

환자가 카우치에 눕는 것 그리고 자유 연상으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하도록 한 이것이 정신분석으로 이름이 붙여지고 처음으로 정신분석”(psychoanalysis)라고 이름이 공식으로 발표된 것을 존(Jones) 1896, 3, 15에 파리에서 그리고 독일에서는 1896, 5, 15일로 노트를 하고 있다.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을 긴장이 이완 되어진 마음의 상황 안에서 그 상황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도록 요청을 받는다. 그들의 생각들을 확산 된 유형으로 걸어 돌아 다니게 해 주는 것으로부터 프로이트는 그 흐름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으로 다시 읽는 프로이트 시리즈 3부는 종료하고 그 다음에는 제 4 부가 이어질 것이다. 여기에서 치료자정신분석 홈페이지에 있는 히스테리아(hysteria)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자 한다.

 

히스테이라의(hysteria) 역사

 

히스테리아(hysteria)는 가르코트 시대에서 등장은 것은 아니었다. 히스테리아는 고대 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역사가들은 인간의 역사를 고대, 중세, 현대로 나누어서 구분을 한다. 고대 시대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로써 기원전 (B.C.) 300년에서 동 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시점인 5세기까지를 고대 시대로, 그리고 500년에서 1500년까지를 중세 시대로, 1500년 이후를 현대 시대로 구분을 한다. 일부 학자들은 현대를 다시 세분화 해서 1500년에서 1900년까지를 근대 시대로, 그리고 1900년 이후를 현대 시대로, 2차 세계 대전 이후를 후기 현대 시대로 구분을 하고 있다.

고대 시대

 히스테리아(Hysteria)는 병으로써 고대 시대에서부터 존재하였다. 그리스 시대에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에 의해서 이름이 붙여진 병이었다. hyster 는 그리스어로 자궁이라는 뜻이고 i는 그리스어로 병이라는 뜻으로 히포크라테스가 자궁이 몸에 돌아다니면서 병을 일으킨다고 해서 hysteria라고 병명을 붙였다. 자궁은 여성들만이 가진 장기로써 자연히 히스테리아는 여성의 병이었다.

중세 시대

 중세 시대는 기독교 시대로써 기독교의 영향으로 그리스 시대의 마음, 심리라는 용어 즉 pysch라는 용어가 영혼 즉 soul, spirit 등으로 바뀌었다. 히스테리아는 질병에서 이러한 질병을 가진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나쁜 영혼이 몸에 들어와서 생긴 것으로 마녀, 마귀, 귀신, 악령 등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었다. 마녀는 귀신에 몸에 들어와서 해꼬지를 한다는 기독교식의 해석으로 귀신이 들린 사람은 불에 태워죽이는 형벌이 가해졌다. 14세기에서 17세기 사이에 유럽에서는 마녀 사냥(witch craft, witch hunting)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다. 유럽에서 마녀로 낙인이 찍혀서 불에 태워 처형된 사람들이 10만명이 넘었다. 제네바에서는 3개월 만에 200명이 처형되었고 스콧틀랜드에서는 약 3만명이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녀 사냥이라는 용어는 지금도 정치 사회학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있다. 억울한 사람들이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마녀 사냥, 마구잡이식으로 몰아간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근대시대

 마냐 사냥은 16세기, 17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14세기에서 16세기는 르레쌍쓰 시대로 문예부흥의 시대였다. 그리스 로마의 문화의 부흥을 부르짖으면서 이태리에서 시작된 문예부흥은 무지, 미신, 종교 맹신으로부터 절대 왕권의 시대로 계몽주의 시대로 흘러가면서 사람들이 무지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이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변해갔다. 17세기까지는 정신적으로 병든 히스테리아 환자들을 귀신이 들린 사람으로 취급해서 때리거나 고통을 가하거나 고문을 해서 몸에 숨어있는 귀신을 몸 밖으로 도망을 가게 하는 것이 대부분의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게 되면 믿는다는 쪽으로 흘러가면서 가스너(Gassner)가 등장하게 되었고 귀신을 쫒아내는 굿을 하는 exorcism은 메즈머(Mesmer)의 등장으로 병을 치료하는 치료법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히스테리아 hysteria가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었다. 히스테리아는 여성의 질병으로써 메즈머에 의해서 치료 기법으로 최면학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메즈머의 등장은 미신, 마녀, 무지에서 이성, 과학, 질병으로 진화를 하게 되었다. 귀신을 쫓는 굿을 하는 exocrist에서 의사의 질병 치료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가르코트(Charcot)와 베른헤임(Bernheim)이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현대 시대

 19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가르코트와 베른헤임은 히스테리아의 원인이 심리적인 것임을 밝혀냈다. 프로이드는 히스테이라의 심리적 원인이 근친상간, 강간, 폭력 등과 같은 심리적 상처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증세로 등장하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게 된 것이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초반기에 프로이드는 히스테리아의 치료 기법을 반쪽 치료인 최면학에서 온전한 치료기법인 정신분석으로 바꾸면서 히스테리아의 원인은 근친상간, 강간, 폭력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설명을 하는 유혹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증명을 할 방법이 없었다. 성인 히스테리아 환자들의 어린 시절의 기억 회복이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증명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섹스 윤리 때문에 히스테리아 환자의 부모나 인척의 가해자들이 이것을 환자의 거짓말, 지어낸 상상으로 몰고 감으로써 어린 시절에 일어난 상처가 사실임을 증명할 수가 없었다. 또한 히스테리아 환자는 각계 각층에 분포되어있어서 그들의 부모들의 반발을 무마시킬 수 없게 되어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같은 처지가 되자 유혹 이론을 접고 어린이들의 상상에 의한 부모들과의 왜곡된 관계로 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이것이 오디프스 콤프렉스 이론이 된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들어가면서 프로이드의 유혹이론은 제자들에 의해서 포기되었으나 몇몇 제자들에 의해서 유혹 이론은 계속에서 그 맥을 이어나갔다. 항가리의 정신분서학회 회장인 샌도르 프렌치(Sandor Frenczi), 파울 페드론(Paul Fedran) 등이 그들이다. 여기에 제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의 정신적인 장애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심리적 상처 이론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대부분의 군 정신과 의사들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보이는 이상한 행동 들 즉 깜짝깜짝 놀라거나, 몸이 마비되거나, 오줌을 싸거나,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하거나, 악몽을 꾸거나, 헛소리를 하는 것 등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군인들을 심약한 군인들로 평가를 했다. 전쟁이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비급한 군인으로 매도를 했다. 군 정신과 의사들은 이런 군인들을 포탄 쇼크를 받은 것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프로이드 밑에서 1년간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에 군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던 미국인 아브라함 가디너(Abraham Kardner)  전쟁 군인들의 심리적 문제를 연구하면서 그 연구 결과를 1945년에 전쟁 신경증(War Neruosis)이라는 책으로 출판 하면서 군인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는 심약한 군인들이 받는 포탄 쇼크를 전쟁 신경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이 보이는 증세들은 히스테이아 증세와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깜짝깜짝 놀람, 비명을 지르는 것, 불면증, 입맛 상실, 악몽, 비명을 지르는 것, 과도한 긴장, 기억 상실, 꽁꽁 얼어붙는 마비 증세 등은 여성들의 히스테리아 증세가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즉 남자들도 히스테리아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었다.

 20세기 후반기에 베트남 전쟁에서 전쟁 신경증은 많은 정신과 의사들과 정신분석학자들,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 신경증을 가진 군인들이 심약한 군인들이 아니고 어린시절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로써 열악한 환경에서 그 상체가 재연되는 것임을 밝혀냈다. 전쟁에서 무공 훈장을 받은 용감한 군인들도 장기간 전쟁에 시달리게 되면 전쟁 신경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1980년에 개정된 DSM- (DSM은 미국 정신 의학회에서 발간하는 정신장애에 대한 진단과 통계 분류집의 약자로써 미국에서는 10년 마다 한번씩 미국 전역의 이름난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치료 심리학자들이 모여서 사라진 정신장애 혹은 새로 등장한 정신장애들을 분류하고 통계와 진단 분류집을 만들고 있다)에서 히스테리아(hysteria)는 역사에서 그 이름이 사라지고 그대신에 세부적인 이름인 상처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신체화 장애, 전환 장애, 히스트로닉 성격 장애 등으로 세분화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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