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치(Couch)에 누워서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받고 있는 분석가와 분석을 받는 사람

 

 

프로이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사실 1

 

다시 읽은 프로이트(Freud)

 

20세기 100(1900-1999)의 역사에서 누가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공헌을 남겼느냐? 라는 질문을 세계의 석학(碩學)들에게 한 TIME 잡지사가 그 결과를 1999 3 29일자 커브 스토리(표지 삽화) 에서 프로이트가 1순위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2순위로 발표를 하면서 환자로 카우치에 누워있는 아인슈타인을 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치료를 하고 있는 그림을 만화로 그린 그림을 소개를 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비엔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신경과 의사로써 실제로는 신경과 환자를 한 사람도 치료를 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가 졸업을 하고 신경과 의사로써 개업을 했을 때 새내기 의사였던 프로이트는 환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선배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브로이어(Breuer)에게 찾아가서 환자를 한 사람 구걸을 했다. 브로이어는 이미 의사로써 명의(名醫)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그가 2년 동안 치료를 하고 있던 유태인 백만 장자의 딸인 안나 오(Anna O)라는 여성을 소개를 해 주었다. 안나 오는 눈이 한번씩 보이지 않는 증세,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를 하지 못하고 영어로 말을 하는 증세, 손가락이 다섯 개의 뱀으로 보이는 환각 증세, 오랜지 주스를 먹지 못하는 증세, 왼쪽 손이 마비되어 바늘로 찔러도 감각이 없는 증세 등의 다양한 증세를 가진 21살의 5 개 국어(모국어인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히브류어)를 말할 수 있는 인텔리전트 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증세들은 종합 검사 결과(X-선 촬영) 신체적인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 당시 5년째의 비엔나 의과 대학을 부케(Brucke) 해부학 연구 실험실에서 3년을 더 공부해서 해부학에 자신만만했던 프로이트가 안나 오양의 치료에서 속수무책으로 그의 선배인 브로이어에게 찾아가서 그녀가 어떤 환자인가? 그리고 2년 동안 어떻게 치료를 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히스테리아(hysteria) 환자이고 최면으로 치료를 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 당시에 왕의 주치의 이자 의과대학 내과 교수였던 세계적인 최면 치료사인 가르코트(Charcot)가 파리에서 최면으로 히스테리아 환자를 치료를 하고 있는 살페트리에 병원(Salpetriere) 1885, 10월에 유학을 떠 남으로써 그리고 10년 동안 히스테리아 환자를 최면으로 연구하다가 최면에 걸리지 않는 환자들을 위해서 온전한 모든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을 1895년에 브로이어와 공동 연구로 히스테리아에 대한 연구”(Studies on Hysteria)라는 책을 출판해서 프로이트의 인생이 신경과 의사에서 정신분석가로 바뀌게 되었고 드디어 정신분석학이 탄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치료자가 밝힌 바 있다(김종만, 1999,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

안나 오양은 물론 가명이었다. 그녀의 실명은 베르다 파펜헤임(Bertha Pappenheim)으로 프로이트에게 치료를 받아서 회복이 되어 이후에 평생을 사회 복지와 어린이와 여성들의 권익을 위해서 사회 개혁 운동가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 받아서 그녀의 사후에 서독 정부가 1954년에 훈장의 수여와 함께 기념 우표로 발행이 되었다(Ellenberger, 1970)는 것은 널리 잘 알려져 있다.

프로이트의 공로는 정신 의학에 뿐만 아니라 심리학, 문학, 예술, 정치, 사회,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극찬을 받고 있다. 그의 무의식의 발견은 오늘날 전위 예술, 추상파, 입체파 등의 표현들이 무의식의 표현이 아닌가? 스텐포드 대학의 석좌 교수인 에릭 프롬(Erick Fromm)은 프로이트를 앞으로 100년 혹은 200년 안에 프로이트의 이론을 뒤집어 엎을 이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의 프로이트와 정신분석에 대한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김종만, 1999,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본 자아의 성장과 발달, pp 619-620).

“현대 예술의 정신적 바탕을 형성해 준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로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심층 심리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예술가의 직관을 통하여 막연하게 나마 파악된 바 있었던 인간 의식의 어렴풋한 분야가, 이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을 때 의학자나 심리학자 못지 않게 예술가에게도 그 끼친 바 영향은 심각하였다. 프로이트의 연구는 원래 임상 의학적인 것에서 출발하였지만, 억압된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일일이 헤쳐 가면서, 거기서 이른바검열에 걸려 억압된 본능적 욕망을 밝혀 냄으로써 19세기 인간관에 근본적 수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정신분석학이 무의식 세계의 이름 지을 수 없는 불안과 소망, 욕구와 갈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게 됨으로써, 인간의 내적 심층에 대한 새롭고 넓은 시야가 열렸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괴물의 정체가 더 잘 설명될 만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욱 더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열림으로써, 예술가는 자신의 감수성과 통찰력을 구사하여 프로이트가 발견한 마음의 비밀을 자기들 나름으로 또한 찾아내고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1차 대전 후의 새로운 심리주의 작가들은 이 방법을 빌려서 이른바의식의 흐름의 문학을 만들어 냈다. 즉 현실을 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종래의 평면적인 묘사 방법을 탈피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학은 물론 미술의 영역에까지 가장 현대적인 주장의 하나로 지목될 수 있는 초현실주의도 심층 심리학의 영향 아래 생겨났다. 그것이 주장한 바는 조화나 비례, 리듬 같은 19세기적밝은 세계의 미학 원리를 배제하고 그 대신 무의식 세계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갖가지 형상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미적 효과를 얻자는 데 있다. 초현실주의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사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와 심미적 윤리성과 선입견 없이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을 적을 따름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현실적 의식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 연상, 또는 꿈이나 상상 같은 비합리성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초현실적 차원으로 대상을 옮기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현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길로 흐르는 것은 필연이며, 기존의 가치를 증오와 모멸의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게 된다.

필자(치료자로 소개)는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들을 정신분석학자들이 쓴 글들을 통해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을 소개하면서 35년의 세월이 흘러가서 30대 중반에 미국의 대학 1학년에서부터 심리학 전공으로 시작한 공부가 벌써 70대의 노인으로 변해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프로이트의 전기(일생)를 쓴 영국의 신경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어네스트 존(Ernest Jones)이 직접 쓴 프로이트의 일대기를 잊고 있었다. 이제 정신분석의 매니아(mania)로써 정신분석의 책을 쓰고 소개를 하면서 장작 프로이트의 전기를 빼먹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한 때문에 어네스트 존이 쓴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의 영문 원서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프로이트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 이 글을 통해서 소개를 하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어네스트 존은 영국인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한 신경과 의사로써 1907년에 융(Jung)을 통해서 프로이트를 소개 받게 되면서 프로이트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작가였던 제임즈 스트라취(James Strachey)가 역시 프로이트를 알게 되었고 프로이트 밑에서 2년 동안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어네스트 존은 프로이트의 독일어 원본들을 영어로 번역하다가 제임즈 스트라취에서 일임하고 스트라취가 프로이트의 허락을 받아서 독일어의 정신분석 서적과 논문들을 영어로 번역하게 되어 영국에 소개를 하게 된다. 어네스트 존은 영어로 정신분석을 치료를 하는 첫 분석가가 되었다. 프로이트와 친구 겸 스승으로 프로이트의 막내 딸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와 연인으로 결혼을 하려고 했으나 프로이트가 자신의 딸을 여성으로 보지 말고 여동생으로 보라고 한 것에서 결국은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Stolorow & Atwood, 1997).

존과 스트라취는 이후에 영국에 정신분석 학교를 세우고 정신분석학을 위해서 제자들의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존은 스트라취 밑에서 11년 동안 소아과 의사로써 정신분석을 수학하고 수련을 받은 세계적인 정신분석가인 위니코트(Winnicott)가 탄생하게 되고 그리고 어네스트 존 밑에서 수학을 받은 죠안 리비에(Joan Rieverer)가 첫 여성 정신분석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녀 밑에서 영국의 여성 정신분석가들인 수잔 이삭(Susan Iassac)과 실비아 페인(Sylbia Payene)이 탄생하게 되면서 영국의 정신분석가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되었다. 죠안 리비에는 어네스트 존으로부터 오스트리아에 메나리 크레인(Melanie Klein)이라는 소아 정신분석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존을 설득해서 영국으로 초빙을 해서 그녀가 이후에 대상관계 이론을 탄생시키게 된다. 메라니 크레인 밑에서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로젠필드(David Rosenfeld)와 외과 의사인 윌프레드 비용(Wilfred Bion)과 의사였던 여성 분석가인 한나 세갈(Hana Segal: 스승인 크레인의 전기를 쓴 장본인) 3총사가 크레인 밑에서 수학하고 연구를 함으로써 이들이 정신분열증의 정신분석 치료에 개척자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가담한 프란시스 투스틴(Frances Tustin)이 자폐증 치료의 세계적인 여성 분석가로 활동을 하게 된다.

어네스트 존는 1909년에 미국의 심리학 박사 1호인 스탠리 홀(Stanly Hall)이 마사츄세츠주에있는 클라크 대학 20주년 개교 기념일에 프로이트가 융(Jung)과 존(Jones)과 샌도르 프랜치(Sandor Frensczi)를 데리고 갔고 미국에서 프로이트의 제자인 아브라함 브릴(Abraham Brill)과 함께 스탠리 홀과 함께 찍은 사진은 프로이트의 전기에서 소개되어지고 있다. 이후에 어네스트 존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국제정신분석 학회 회장과 영국 정신분석 학회 회장으로 활동을 해서 정신분석을 영국에 소개하고 개척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후계자들인 비용은 이후에 1962-1965에 영국 정신분석학회 회장을 위니코트는 두 번이나 영국 정신분석학회 회장(1956-1959, 그리고 1965-1968)을 역임했다. 이들에 의해서 정신분석학이 영어로 번역되어져서 지금은 프로이트의 독일어 정신분석이 이제는 영어의 정신분석학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나치의 유태인 박해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에들러의 정신분석학의 서적들이 불태워지고 금지되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융(Jung)의 분석 심리학을 제외하고는 번창을 하지 못했다. 전후에 독일은 영어의 정신분석학을 수입해서 독일어로 다시 번역을 해서(프로이트의 독일어의 영어 번역에서 자아(ego), 원초자아(id), 초자아(superego)라는 말은 독일어에는 없는 용어로 스트라취가 영어의 낱말로 사용했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전용어가 영어가 된 것) 사용하는 웃지 못할 비극이 발생 되었다(Ellenberger, 1970).

어네스트 존과 제임즈 스트라취는 프로이트가 나치의 점령으로 위험해지자 제자들과 협력해서 나치와 협상으로 프로이트 가족이 추방을 당하는 형식으로 영국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고 제 2 차 세계 대전 발발 2주일 전에 프로이트의 임종을 옆에서 지켜본 장본인으로 에너스트 존은 이후에 프로이트 사후에 프로이트 가족들의 도움으로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이라는 제목으로 프로이트의 전기(傳記)를 썼다. 이 책이 1953년에 출판되었고 출판 첫 해에 3번이나 재 출판을 해야 했다. 그리고 1963년에 출판된 뉴욕의 베이직 출판(Basic Books, Inc) 사는 18의 재 출판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프로이트의 전기의 글을 쓰려고 했던 목적을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나에게 떨어진 한 개의 과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계속적으로 프로이트와 나는 함께 공동 연구 작업을 했다(그룹의 멤버). 그러나 살아 남은 유일하게 사람은 나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트와 40년 동안 가까운 친구였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그의 정신분석적인 움직임이라고 불리던 것의 한 사람의 핵심 멤버였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서 했던 것처럼 똑 같은 제자들의 훈련 과정을 내가 통과를 했다는 것과 철학, 신경학, 언어 장애들, 정신병리학 등을 똑 같이 훈련을 통과 했다는 점이다. 그 안에서 그 순서는 나로 하여금 그의 분석적인 기간 이전의 그 연구들을 따라 오도록 그가 나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것의 변화가 정신분석으로 변했다. 아마도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라는 그 사실은 그 모임이 나에게 다른 사람들 보다 한층 더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의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성격에 대해서 내 존경과 찬사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내 자신의 그에 대한 영웅적 숭배는 내가 그들 만나기 이전에 이미 확인을 했던 특징들이었다.

다음의 글에서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삶에서 알려지지 않는 내용들을 어네스트 존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이라는 전기 속에서 필자가 알게 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적어도 내가 35년 동안의 정신의학과 심리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치료를 해 오면서 내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내용들에 깜짝 놀랬고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내용들을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함에서 이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5년제의 비엔나 의과대학을 8년 만에 졸업하면서 3년을 부케(Brucke) 해부학 실험 연구실에서 3년을 더 연구를 하면서 해부학에 자신만만했다는 것과 그의 첫 환자인 안나 오의 치료에서 신체적 이상이 없는 환자를 치료하면서 자신의 의학적 지식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탄식하고 프랑스에 유학을 해서 가르코트(Charcot) 밑에서 최면학을 공부하면서 무의식을 발견한 것은 이미 밝혔듯이 잘 알고 있다.

프로이트는 평생 동안 가르코트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그로부터 무의식 이론을 그리고 그의 친구 겸에 스승 겸에 동료였던 브로이어(Breuer)로부터 새로운 학문인 최면학을 소개 받아서 그들의 영향으로 세계적인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네스트 존의 프로이트의 생애에 대한 저서를 통해서 사실은 프로이트가 학문적 기반이 비엔나 의과대학 시절부터 확고한 바탕이 닦아 졌다는 것을 필자가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가 비엔나 의과대학 3학년 때 처음으로 비엔나 의과대학의 동물학 교수인 까루스(Claus)에게 세계에서 처음으로 설립이 된 동물학 연구소에 첫 연구 조교(프로이트가 똑똑했기 때문에 첫 연구 조교로 임명을 강조)로 연구한 그의 논문에서 그는 철저한 현미경 탐색 교육을 철저하게 받았고 그의 첫 번째 연구 주제가 뱀장어의 성기 구조였다. 그는 뱀장어들을 공급을 받아서 현미경으로 성기 구조를 연구하는데 400 회의 뱀장어 해부 실험 연구를 했지만 그의 결론은 눈으로 뱀장어 성기 구조를 보고 확인하지 못하고 그의 선임 연구원인 스리키(Syrski)의 연구를 확인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에 불만족했지만 까루스(Claus) 교수는 실험의 완벽한 과정에 만족해서 그의 논문을 학회 논문집에 실어 주었다. 그것이 현미경 생리학자로써 첫 출발이었음을 밝히고 있다(Jones, 1963).

이후에 프로이트가 대학 3학년 후반기에 비엔나 의과대학 생리학 교수였던 부케(Brucke)를 만난 것을 프로이트의 일생에서 두 번째 삶의 전환점이라고 존(Jones, 1963)는 밝히고 있다. 첫 번째가 가르코트(Charcot)였다면 두 번째 프로이트의 삶에 전환기를 제공해준 사람으로 그는 부케(Brucke)교수를 꼽았다. 프로이트는 그가 부케 교수 밑에서 10살 많은 그의 선배 선임 연구 조교들인 엑스너(Exner)와 프레이첼-마르쇼(Fleischi-Marxow) 세 사람을 일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그가 만난 최고의 행운으로 생각했다고 존(Jones)은 평소의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해서 밝히고 있다. 프로이트가 부케 생리학 연구소에서 근무를 했던 6년 동안의 기간을 가장 행복했던 대학생활의 기간으로 만족함을 표현한 것에서 찾고 있다.

부케가 비엔나 의과대학 생리학 교수로써 이름이 나게 된 것은 부케와 두 보이스-레이몬드(Du Bois-Reymone) 두 사람의 우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두 사람은 이미 대학 시절에 절친한 동료로써 그들은 유기체의 연구에서는 물리학과 화학과 수학을 통해서 만이 그리고 철저한 관찰과 실험 연구를 제외하고는 일제 다른 것들을 배격하자는 맹세에서 출발을 했다. 그 이후에 이 두 사람의 우정에 가담을 하게 된 것이 헤몰처(Helmholtz)가 가담을 했고 그리고 그 이후에 루드위그(Ludwig)가 가세를 했고 이후에 이 그룹이 베를린 물리학회가 되었다. 그들은 부케를 동방에 있는 대사님의 별칭으로 자주 만났다.

헤몰츠는 1942년에 로버트 메이어(Robert Mayer)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발표된 이후에 무관심 속에 20년이 지나간 것을 새로 발굴해서 이론화하게 되면서 이들의 모임이 독일의 물리학계가 되었고 이들이 바로 독일의 물리학계의 혁명적인 변신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 이후에 헤몰츠 교수의 리더십 하에서 그들의 그룹이 헤몰츠 학파로 불리게 되었고 이 학파가 독일의 과학과 의학 학회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들의 제자들이 물리학계를 석권을 하게 되면서 독일의 과학이 세계적인 리더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Ellenberger, 1970).

(Jones, 1963)이 밝힌 것은 그 이전에는 사실은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뒤쳐져 있었다. 독일은 괴테(Goethe)와 철학자 쉘링(Schelling)의 영향력으로 사색적 물리학이 우세했고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다 그 이유로 계몽주의의 시작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고 낭만주의의 시작은 독일에서 유행을 했던 것으로 독일은 과학계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뒤떨어져 있음을 통감하고 헤몰츠 학파들이 그 전통을 깨부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세계적인 과학의 대국이 된 것이 바로 부케와 두 보이스-레이몬드의 우정의 시작해서 찾고 있다.

프로이트는 그의 스승인 부케 교수를 푸른 눈을 가진 작은 체구의 조용하고 과묵한 청교도 인으로써 타협이 없는 이상주의자로 철저한 과학의 신봉자로 묘사를 한 것을 기술하고 있다. 헤몰츠가 비엔나를 방문을 했을 때 그의 실제 대면의 기회를 놓친 것을 프로이트가 평생 후회를 하고 있었다는 말과 그리고 프로이트가 그들은 내가 존경했던 우상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Jones, 1963)는 프로이트를 오스트리아 인으로 보다 철저한 독일인으로 독일어와 독일의 물리학계의 후계자로 기술하고 있다.

1874년에 부케는 자신의 생리학적인 실험과 이론들을 책으로 출판을 했다. 그는 살아 있는 유기체는 죽은 유기체(기계와 같다)와는 달라서 끝임 없는 동화 작용으로 서로서로 힘들로(forces)로써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개개의 조직 속에서 개체들은 각자의 힘들을 계수로 가지고 있다. 이들을 단순화 시키면 그들이 바로 밀어내는 힘과 끌어 당기는 힘으로 구성되어있다. 원자들, 전기, 자력들 등이 모두 이러한 힘들의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원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라는 그의 핵심을 프로이트가 철저하게 숙지를 해서 그는 1926년에 정신분석의 역동적인 면들 설명을 하면서 생리학의 역동적인 면을 힘들이 서로서로를 도와주거나 억제를 하거나 타협을 만들어낸다라고 강조를 한 것은 부케의 영향력을 정신 역동학에 응용한 것을 지적을 하고 있다.

특별하게 존(Jones, 1963)는 동물학 연구소의 크라우스(Claus)는 프로이트 보다 20세가 많고 그리고 부케는 포로이트 보다 40세가 많은 점을 들어서 프로이트가 어린 시절에 자신보다 20세가 많았던 이복 형님인 엠마누엘(Emanuel)을 엄마와 상상 속에 라이벌 관계와 40세가 많았던 아버지와 관계를 무의식인 비유를 들어서 질투심과 존경심으로 비교 대조를 하면서 동물학 연구실에서 짜증과 좌절을 그리고 해부학 연구실에서 만족감과 내면의 평화를 기술하고 있다.

어네스트 존(Ernest Jones, 1963)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의과 대학 실에 그는 개업 의사로써 관심이 없었다. 그는 크라우스 교수와 부케 교수 밑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현미경 생리학자였다. 그들 밑에서 연구한 논문들이 이미 논문집에 3편이나 실려 있었다. 그는 생리학자로써 평생 동안 연구 교수직책을 원했다. 그래서 5년째의 의과 대학은 3년 더 공부해서 8년 만에 졸업을 했고 그리고 부케 연구소에서 연구 조교로 6년을 근무를 했었다. 그런데 부케 밑에는 프로이트 보다 10년 선배인 두 사람(한 사람은 엑스너(Exner)이고 또 한 사람은 프레이첼(Fleischl)이 이미 10년 전에 연구 조교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트에게 돌아갈 자리가 없었다. 프로이트의 눈치를 챈 부케 교수가 프로이트에게 생리학 연구소에서는 더 이상 자리가 없으니 개업의사 준비를 위해서 종합 병원의 레지던트 수업을 받도록 알선해 주었고 프로이트는 6년 동안 근무를 했던 부케 해부학 연구소를 떠나서 비엔나 의과대학 종합 병원에서 6년 동안 레지던트 과정을 밟게 된다.

프로이트는 비엔나 종합병원에서 내과 교수로 이름이 높았던 노트나젤(Nothnagel) 밑에서 6 6개월 동안 레지던트 과정을 이수했다. 노트나젤 교수는 독일에서 온 교수로 비엔나 의과대학에서 23년간 근무를 한 철저한 헤몰츠 학파의 후계자로 아침 8-오후 6시까지 철저한 근무 시간의 준수와 근무가 끝나면 관련 치료 사례들에 대한 연구 논문을 철저히 읽을 것을 강조했다. 누구든지 5시간 이상의 잠을 자는 사람들은 의학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의과 대학생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강의에 참석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는 집에 가야 한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노트자젤 교수는 학생들과 환자들로부터 우상이었다.

그 다음에 그는 메이너트(Meynert) 교수의 정신과 치료소로 이동을 했다. 메이너트(Meynert) 교수는 부케 교수만큼 뛰어난 교수였다. 그는 헤몰츠 밑에서 공부한 철저한 뇌 해부학의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메이너느 교수의 정신과 강의가 그에게 가장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한 최고의 명()강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메니너트 교수를 숭배하고 존경을 했다. 프로이트는 메이너트 정신과 병동에서 5개월을 근무를 했다, 그 중에서 2개월은 남자 병동에서 3개월은 여자 병동에서 근무를 했다. 이후에 피부과와 그리고 안과로 자리를 옮겼다가 비엔나 종합 병원에서 6년 과정의 레지던트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1885년에 29세의 나이로 개업의사의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비엔나 의과대학에서 레지던트 4년 차의 마지막 수료생들에게 주는 6개월의 해외 유학의 장학금의 특전이 주어진다는 발표에 응시하게 되었고 3명을 선발하는 장학생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6개월간 파리의 히스테리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가르코트(Characot)의 살페트리에(Salpetriere) 병원에 유학을 가게 됨으로써 프로이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가 비엔나 종합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에 그는 미래의 그의 부인인 된 먀사 베르네이(Martha Bernays)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약혼을 하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8년 동안의 의과대학생 시절에 그가 6년 동안 부케 해부학 연구소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에는 그는 철저한 현미경 해부학자였다. 그리고 6년 동안 비엔나 종합 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에는 그는 신경생리학자로 변신을 했다. 개업 후에 신경과 의사로써 준비를 하기 위해서 관심이 신경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가르코트의 최면학교를 방문하게 되면서 그는 히스테리아에 관심과 철저한 최면학으로 관심이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신경학자로써 출발이 최면치료 학으로 바뀌게 되고 이것이 정신분석의 탄생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신경과 의사로 개업을 하려고 할 그 당시에는 유럽에서는 헤몰츠 학파의 제자들이 유럽의 과학계와 의학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비엔나에서는 그들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부케와 메이너트로써 그들은 철저한 생리 해부학과 뇌 해부학으로 물리, 화학 그리고 수학을 통해서 만이 유기체를 설명하는 것으로 한정이 지었다. 철저한 실험과 과학적인 증거에 바탕을 둔 학문에 근거한 실증주의 과학 즉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과학으로 인정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메이너트의 뇌 신경학이 심리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부케의 해부학이 에너지의 이동을 강조하게 되면서 이것을 뇌 신화(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인정받고 있는) 학으로 그리고 에너지 신화 학으로 절대적으로 신봉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에 대한 반발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893년에 문헨에서 열린 제 3차 국제 심리학 총회에서 데오도어 립Theodor Lipps, 1897)이 무의식을 주장하고 나섰고 이러한 영향력이 100년 전에 비차드(Bichat, 1795)가 만들어낸 금언이 유행을 했다. “점성술이 별들의 생리학이 아닌 것처럼 생리학이 동물들의 물리학이 아니다라는 말로써 실증주의의 과학이 심리학으로부터 영혼을 추방해버렸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철학자들과 동물 자장 이론가들 그리고 최면 치료사 들의 계통으로 이어진 심리학에서 뇌 신화 학으로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서 심리학에서 마음을 말살해버렸다는 것을 프로이트가 감지를 하고 그가 부케와 메이너트가 만든 뇌 신화 학과 에너지 신화 학을 다시 물리, 화학적인 설명으로써 무의식과 의식을 과학적으로 기술해서 심리학에 영혼을 불어 넣어서 자유연상과 대화라는 축으로 만든 정신분석학의 탄생을 낳게 된다.

앞으로 계속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프로이트에 대한 삶과 업적을 어네스터 존의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The Life and Work of Sigmund Freud Vol : The Formative Years and The Great Discoveries)의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연재로 소개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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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치료자의 정신분석 홈페이지에서 프로이트의 삶과 업적을 역사가들이 평가를 한 내용을 소개한 글을 인용 것이다

 

1999 3 29일자 TIME지에 소개된 20세기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와 사상가들의 1순위로 프르이드와 2순위가 아인슈타인이 선정되 TIME의 표지 모델로 소개되었다.

위의 그림에서 프로이드의 환자로 카우치에 누워서 프로이드의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묘사해서 프로이드의 업적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에게 가장 충격을 준 3대 사건

 

역사가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의 자존심에 쇼크를 준 3대 사건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지동설

중세까지 인간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다. 여기에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반기를 들었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내 놓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것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과학자인 갈릴레이 갈릴레오이다. 그는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측한 사람으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알리는데 앞장선 과학자였다. 문제는 그 당시에 사회적 상황이 이러한 지동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유언 비어를 퍼뜨려서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불순한 목적을 전파하고 있다는 이유로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사회 전복을 목적으로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였다. 갈릴레오가 지도자들에게 과학적으로 설명을 해서 그들을 설득 시키기에는 그의 이론이 먹혀들어가지 않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갈릴레오는 정신이 돌아 버린 학자로 치부했다. "당신의 눈을 뜨서 하늘을 지금 쳐다 보세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눈으로 확인을 하도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십니까? 지구가 돌고 있다면 당신이 어지러워서 어떻게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주장하는 지도자들에게 갈릴레오가 그 당시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계속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면 사형에 처하겠다는 재판장의 경고에 갈릴레오는 결국 절대로 다시 지동설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결국은 풀려나서 재판정을 나오면서 하도 기가 막혀서 "지금도 지구는 돌고 있는데!"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의 교리에 어긋나는 이론을 전파한 것에 대한 쾌심죄로 처형을 하지 못하고 과학적 업적을 참조해서 무죄 석방한 것을 좋지 못하게 생각한 로마 캐토릭 본부에서 결국은 갈릴레오는 호적에서 제외시켜 버린 것이었다. 캐토릭 신자의 명부에서 칼릴레오의 이름을 파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을 캐토릭에서는 엑스 커뮤니케이션(ex-communication)이라고 부른다. 즉 죽어서 심판을 받을 때 캐토릭 신자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은 천당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지옥에 가라는 뜻이었다. 캐토릭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인 천동설에 반대해서 반기를 들고 사람들에게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오가 한없이 미웠을 것은 뻔한 일이다. 갈릴레오는 캐토릭 교인의 명부에서 이름이 제외된지 몇 백년이 지난 후에 1992년에 로마 카토릭 본부에서 칼릴레오는 사면 복권한다는 기자 회견을 했다. 신문 기자들이 로마 캐토릭 대변인에게 갈릴레오가 죽은지가 몇 백년이 되었는데 왜 사면복권을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이제 지동설은 유치원 아이들도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굳지 숨기고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누구도 지동설을 부인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점에 와서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뜻이 숨이있다고 했다.

2008 3 5일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갈릴레오와 지동설에 관련된 기사를 보도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교황청에 갈릴레이 동상 세우기로

1633
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이단 재판에 회부했던 바티칸 교황청에 갈릴레이의 동상이 들어서게 됐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4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그의 동상이 교황청 내 바티칸 정원에 세워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정원 주위에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해 재판을 받을 당시 감금됐던 건물이 있다.

니콜라 카비보 교황청 과학원장은갈릴레이 문제를 매듭짓고 과학과 종교 사이에 올바른 이해의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동상 건립 취지를 설명했다.

교황청은 1979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이에 대한 종신 금고형 판결을 재고하라고 권고하자 재검토에 들어가 1992년 재판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그를 복권시켰다.

교황청은 갈릴레이의 천체망원경 발명 400주년인 2009년 세계 40여 개국 과학자가 참석하는갈릴레이 회의도 열기로 했다. 갈릴레이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예수회도 갈릴레이 재판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로마, 피사, 피렌체 등에서도 다양한 400주년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한편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올해 1월 로마의 라사피엔자대에서 기념 연설을 할 예정이었으나 추기경 시절 이 학교를 방문해갈릴레이에 대한 재판은 정당했다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돼 일정을 취소한 바 있다(동아일보, 2008, 3, 5)

2.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Darwinism)

 다윈은 1831 22세의 아마츄어 자연주의자로 자청하고 해양 탐사선인 90피트의 길이와 24피트의 넓이를 가진 비글호(Beagles)를 타고 해양 탐선에 몸을 실었다. 5년간 남 아메리카 해안 해양지도를 만들기 위한 항해에 참가를 한 것이었다. 그가 남 아메리까 해안에 있는 갈라파고 군도(Galapagos) 5주일 동안 체류하는 기간 동안에 그 섬에 살고 있는 거대 거북, 검은 도마뱀, 작은 새 들을 수집해서 돌아와서 25년 동안 그들을 연구한 끝에 유명한 저서인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1859년에 출판되었다. 진화론의 시작이었다. 인류학은 현재 직립 보행 인간의 기원을 크로마뇽인으로 보고 있다. 350만년에서 450만년 사이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인간의 기원인 네안덴탈인은 태아가 너무 커서 자궁에서 나오면서 충격으로 멸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그 이후에 진화되어진 크로마뇽인을 인간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 인류학자들이 최초의 인간의 진화의 발상지를 아프리카로 보고 있고 약 750만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일부의 학자들도 있다.

 다윈은 처음에 진화 이론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에 적용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인간이 원숭이에 가깝다는 말을 하는 경우에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다른 동물들의 진화를 강조했다. 다윈의 제자들이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진화가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기독교 시대가 인간을 하느님의 창조물로 보았던 시절에 인간이 원숭이와 유사한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이론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써 인간에 가까운 침판지나 원숭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진화론이 인간의 자존심에 충격을 던진 것이었다.

 최근에 컴퓨터의 발달로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자가 분석되어 완료되었다는 보고들이 나오고 있다. 케놈 분석은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자의 차이가 단지 2%박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1978년 노벨 의학상 수상자인 제랄드 에델만(Edelman) "신경 세포의 다윈니즘"(neural Darwinsm)은 인간의 뇌 세포에도 적자 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이론을 발표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뇌 세포가 가장 자극을 많이 받는 뇌 세포는 번창하고 자극이 없는 뇌 세포들은 도태된다는 학설을 발표해서 뇌 신경 과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신경 세포의 가지치기" 학설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3.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프로이드는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내가 모르는 나 이다"라고 발표함으로써 그 때까지 "내 몸의 주인은 내 마음이고 내 자아 이다"라는 학설을 뒤 엎었다. 철학자들은 내 마음의 "의식" "자유 의지"가 나를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어면 하지 않는 것이 내 자유로운 의지(free will) 즉 의식적 자아 이다(consciousness)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프로이드가 의식은 우리의 자아의 지극히 일부분이고 빙산에 비유하면 물 위에 뜨 있는 물 표면에 나와있는 부분이 의식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 속에 잠겨있는 부분이 무의식으로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70%-80%를 무의식이 차지하고 있다는 정신분석 학설을 처음으로 내 놓아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우리는 출생 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경험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기억에서 사라진 부분은 즉 잃어 버린 기억은 마음 속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고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져서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머리 속에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즉 망각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고 억압되어 의식하지 못하게 무의식 속에 묻혀 있어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런 프로이드의 설명은 최면학에서 최면에 걸린 환자들이 잊어 버린 어린 시절의 상처 기억을 최면 상태에서 기억을 하는 것을 보고 난 후에 자신의 무의식 이론을 체계화하면서 등장하게 되었다.

 프로이드는 우리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이 된 전체가 바로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20% (빙산의 물 위의 표면부분) 80%의 무의식(빙산의 물에 잠긴 부분)이 통합되어져서 우리의 마음을 이루고 있다는 이론을 내 놓게 된 것이었다. 이후에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은 수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어져서 오늘 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컴퓨터의 등장으로 무의식 이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1945년에 피카드(Packard)가 영화 스크린에 눈에 보이지 않게 자막으로 "코카콜라를 마시라"(drink coke)는 글자를 넣어서 영화를 관람한 후에 관객들이 대부분이 코카 콜라를 마시게 했다. 관객들은 왜 코카콜라를 마시느냐는 관찰자의 질문에 "그냥 먹고 싶어서" 라고 대답을 했다. 스크린의 자막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글자를 넣은 것을 의식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이것을 생리학에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지각" "무의식의 지각"(subliminal perception)이라고 부른다. 이 실험은 1992년에 다시 복사되어졌다. 실험 심리학에서 피실험자들을 모아 놓고 스크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자막으로 강이라는 단어인 river  눈에 보이는 단어인 bank 복합어로 비추어 놓고 여기에 관계되는 단어를 찾게 했다. 1번으로 돈이라는 money 2번으로 보트라는 boat를 선택하게 했다. 다시 말하면 갈호 안의 글짜는 스크린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뒤의 글짜는 눈에 보이게 해서 복합어를  (river)bank--->money를 선택하느냐 (river)bank--->boat를 선택하느냐를 실험한 것이다. 만약에 피실험자가 무의식적 지각인 눈에 보이지 않는 river를 모르고 bank만 보는 피실험자는 뱅크는 은행으로 돈인 money를 선택할 것이고 무의식적 지각인 river를 지각한 사람은 riverbank의 뜻이 복합단어로써 강뚝이라는 단어임으로 보트 즉 boat를 선택할 것이라는 실험 목적이었다. 대부분의 피 실험자들은 강뚝이라는 단어와 관계있는 보트 즉 boat를 선택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뇌의 세포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세한 지각을 읽고 있다는 것이었다(Eldelman, 2002). 뇌 신경 과학자인 노벨상 수상자인 에델만은 그의 저서 "의식의 우주"(2002)에서 우리의 뇌 신경 세포들은 서로 정보를 연결해서 경험을 통합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 즉 무의식적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1 50만분의 1초 이상인 지각에서는 "의식"으로 150만 분의 1초 미만의 지각에서는 "무의식"으로 생리학자들은 보고 있다(Edelman, 2002).

 우리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도 엄마와 교감을 하고 있으며(태교) 임신 7개월에 엄마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출생 직후에 엄마의 말을 구분할 수 있고 엄마의 젖을 구분할 수 있다는 학자들의 신생아 대상 실험들이 프로이드의 무의식 이론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출생 직후부터 2살까지는 기억을 할 수가 없다. 뇌에서 언어 지역이 발달하는 하는 시점에 즉 기억의 뇌인 하이포켐파스(hippocampus)가 기억으로 회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2살 이후 기능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이전의 기억은 회상할 수 없다. 그러나 출산 직후에 경험들은 아미그달라(amygdala)라는 감정의 뇌에 기억되어진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신생아가 엄마의 신체 접촉과 엄마의 얼굴 표정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것은 상식이된지 오래이다. 아기는 구두어인 말을 할 수 없지만 표정어인 비구두어를 사용해서 엄마와 감정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표정어들은 뇌에 경험으로 입력이 되어 우리의 마음의 일부분이 된다. 이후에 성인이 되어 이러 기간인 0-3세까지의 엄마와 아빠와 아기의 상호작용이 3-5세 사이에 성격의 골격 형성에 초석이 된다는 것이 정신분석 이론의 근본 바탕이 되었다.

19세기 말에 20세기를 빛낼 가장 위대한 3대 사상가

1. 니체

니체는 1890년대와 1910년대 유럽의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철학자로써 이미 20세기에 들어서기 전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20세기 초에 이미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을 예언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이 과학을 맹신하게 되면서 신을 믿지 않게 되면서 인간의 오만 방자는 결국 과학을 핑계로 파괴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스텐포드 대학의 석좌 교수로써 실존주위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이고 심리학자인 메이(May, 1953)는 그의 저서 "자아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니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니체는 과학이 공장이 되어가고 있음을 경고 했다. 윤리와 자아의 이해가 없는 기술을 발달은 니힐니즘으로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20세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는 신은 죽었다로 썼다. 미친 인간이 마을 광장에 뛰어 들어서 신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소리치료 다닌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웃으면서 신은 이민을 갔다, 신이 항해를 가고 없다.고 했다. 미친 사람은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내가 어떻게 신을 죽였는지 말해주겠다," "누가 지평선을 없애버렸는가? 누가 태양과 지구를 떼어 놓았는가? 누가 우리를 사방으로 넘어지게 움직이게 만들었는가? 발 밑에 공허감을 느끼지 못하는가? 암 흙 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모두들 침묵으로 미친 사람을 바라다 보았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자 내가 너무 일찍 왔나? 고 그들에게 말했다.

 니체는 전통적인 신의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회가 핵심 가치를 잃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 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예언은 대량 학살과 독재자의 출현을 가져왔다. 거대한 이벤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유대교, 기독교의 가치가 시들어 갈 때 야만주의의 밤이 엄습하였다. 니체는 말한다. 새로운 가치의 중심을 발견해야 한다. 모든 가치의 재 가치와 모든 가치의 변화 가치를 주장했다. 과거의 시대에 하나의 구심점을 역할 했던 가치와 목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새로운 구심점을 찾기 못했다(May 1953).

 프로이드는 니체한데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프로이드와 니체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으나 프로이드가 니체의 이론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으로 따 온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다음은 김종만(1999)의 저서 ""에서 니체와 프로이드에 관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청교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25세에 바셀 대학 고전어 교수가 된 니체는 쇼펜하우엘의 영향으로 철학자로 변했다. 그는 1890-1910년 사이에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새 시대의 예언자로 통했다. 토마스 만은 니체를 도덕 심리학자로,크라카스는 니체를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욕구들로  구성되어 있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마음의 에너지는 보존된다. 무의식은 혼란한 생각,감정,본능 속에 존재한다. 꿈 속에서 우리는 초기 인간의 마음의 원형을 볼 수 있다. 꿈은 개인의 과거와 초기 인간의 과거의 파편들이 나타난다. 본능에는 즐거움 추구 본능,섹스 본능,지식에 대한 본능,Power에 대한 본능 등 많은 본능들이 있다. 한 개의 본능에서 다른 본능으로 마음의 에너지가 바뀔 수 있다. 이것이 승화이다. 즉 공격 본능과 섹스 본능에서 예술 작품의 지적 추구 본능으로 바뀔 수 있다. 분노가 억제되어 어떤 대상에게로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면 거짓 도덕으로 변장되어 나타난다. 야성적인 본능이 방출되지 않고 내면으로 억제되어 죄의식이 된다. 이것이 인간의 도덕적 양심의 근원이 된다.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양심의 목소리는 부모님,선생님,이웃,친지들의 목소리이다. 모든 인간은 마음 속에 여인상을 가지고 있고 그 여인상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 여인상으로부터 직접 자신과 무관한 여인을 존경하는 마음이 나오거나 경멸하는 마음이 나온다. 성적인 욕구의 억제는 억압으로 연결되고 이것은 의식과 기억으로부터 제거될 수 있다. 즉 섹스 욕구의 억압이 심하면 섹스 욕구가 느끼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복해야 한다. 인간은 거짓 본능,거짓 도덕으로부터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이것을 정복해야 한다. 무의식은 동물적이고 어릴 때 시작된다. 무의식은 출구가 없다. 무의식은 꿈,정신 이상,열정 속에서 표현되어진다. 무의식은 해결 능력을 제시할 수 없다. 무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구별이 없다. 자기 파괴적 본능,공격적 본능은 섹스 본능 못지 않게 강하다. 프로이드는 니체의 주장을 몇 개의 용어만 수정한 채 그대로 수용하여 자신의 이론으로 만들었다. 원초자아인 Id는 니체에서 따온 용어이고 거짓 양심은 죄의식으로,억제는 억압으로,도덕적 양심은 초자아인 superego로 바뀌었다. 원시인들은 야생의 동물 상태에서 도덕적 양심에 의해서 문화인으로 변했고 도덕과 문화가 원시적 공격 본능을 방출하지 못하게 한다. 야성의 본능이 밖으로 방출되지 않으면 내면의 자신에게로 향하게 된다는 니체의 주장은 프로이드의 저서 문화와 불만속에서 문화는 인간의 본능적 즐거움을 억압하기 때문에 문화가 발달할 수록 인간의 심리적 문제는 많아진다 로 이론화되어 있다(Ellenberg,1970).

2. 칼 마르크스(Karl Marx)

 영어로 발음을 하면 맑스이고 독일어로 마르크스로서 맑스 혹은 마르크스로 발음되어 혼란을 주기도 한다.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우상으로 떠 올랐던 맑스는 공산주의 이론을 제창한 사람으로 정작 자신은 나치를 피해서 영국에 망명해서 죽었다. 그의 이론은 레린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졌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년의 탄생을 가져오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 세계를 휩쓴 공산주의 이론이 이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이제 50년의 세월을 실험에 옮겨지면서 허구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지구 상에 공산주의 이론을 받아들인 나라들 한데서 제대로 밥을 먹고 사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이제 막을 내리고 나라 이름도 러시아로 되돌아갔다. 동구 유럽도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중국 역시 공산주의 이론을 벗어던지고 있다. 맑스는 20세기 초반기에는 각광을 받었으나 이제 반 세기가 지나면서 20세기 후반기에 와서는 그의 이론은 큐바와 북한에서 아직도 빛을 보고 있지만 다시 재 등장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맑스는 프로이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김종만(1999)은 그의 저서 ""에서 프로이드에 대한 맑스의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맑스는 인간의 경제적 측면을 강조했다. 인간은 계급 투쟁에 의해서 진화되며 정의는 절대적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 계급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고 고립된다. 노동자와 농민은 지배 계급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지배 계급들은 노동자,농민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배 계급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들은 프로이드에게 영향을 주었다. 인간의 경제적인 측면 대신에 프로이드는 인간은 섹스에 의해서 진화한다는 섹스적 측면이 강조되고,인간은 계급 투쟁 때문에 서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갈등 때문에 고립된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자신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무의식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환자는 자신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알도록 만들어 줄 때 증세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다는 이론으로 체계화되었다(김종만, 1999)

3. 프로이드

 프로이드는 이미 19세기 말에서 전 세계의 지식인들로부터 20세기를 대표할 3대 사상가로써 손꼽히고 있었다. 그가 쓴 "꿈의 해석" 1900년에 출판 되면서 이미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그가 20세기를 대표할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프로이드는 꿈 해석에서 자신과 환자들의 꿈을 약 1000여개를 분석해서 인간의 내면 심리적 움직임을 현미경을 보듯이 미세하게 관찰했다. 이 책이 출판 되면서 전 세계인이 깜짝 놀라 프로이드는 하루 아침에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명사가 되었다. 꿈 해석은 이미 100년에 출판된 책이지만 지금에 읽어도 하나도 손색이 없는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꿈 해석이라는 책을 성서의 바이블처럼 "3년마다 한번씩 되풀이 읽어야 하는 책"으로 "꿈 해석을 읽어보지 않고는 정신분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말하고 있다.

스텐포드 대학의 석좌 교수인 실존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프롬(Erick Fromm)은 프로이드는 100년 내지 2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로써 앞으로 100년 이내에는 프로이드를 뒤엎을 정신분석 이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0세기 100년 사에서 가장 위대한 공적을 남긴사람

20세기 말에 세계적인 시사 잡지인 TIME사는 1900년에서 2000년의 100년의 역사에서 인류에게 가장 큰 공적을 남긴 사람 100명을 선정하기도 하고 전 세계의 석학들에게 설문지를 보냈다. 그 결과 1위는 프로이드였고 2위는 아인슈타인이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의 창설을 만화의 그림으로 만들어서 표지 모델로 1999 3 29일짜 TIME의 표지 모델로써 아인슈타인이 환자로 프로이드의 치료실에 있는 카우치에 누워있는 만화를 삽화로 출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억을 하는 것만을 즉 우리의 의식적 자아만을 자아로써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등장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80%의 무의식도 자아에 포함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의식하는 20%와 무의식의 80%가 통합이 되어서 전체 내 자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게 된 것이다. 이후에 무의식적인 ""를 찾는 탐색의 여행이 정신분석에서 시작된다. 이 여행의 가장 좋은 예가 꿈의 분석이 정신분석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정신 의학과 심리학 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과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이다. 현대 문학 뿐만 아니라 전위 음악, 전위 무용, 추상파 미술 등에서 강조하는 무의식의 표현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정신분석학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소개하는 한 개의 글을 인용한다(김종만, 1999).

현대 예술의 정신적 바탕을 형성해 준 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로서,우리는 프로이드의 심층 심리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예술가의 직관을 통하여 막연하게 나마 파악된 바 있었던 인간 의식의 어렴풋한 분야가,이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을 때 의학자나 심리학자 못지 않게 예술가에게도 그 끼친 바 영향은 심각하였다. 프로이드의 연구는 원래 임상 의학적인 것에서 출발하였지만,억압된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일일이 헤쳐 가면서,거기서 이른바 검열에 걸려 억압된 본능적 욕망을 밝혀 냄으로써 19세기 인간관에 근본적 수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정신분석학이 무의식 세계의 이름지을 수 없는 불안과 소망,욕구와 갈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게 됨으로써,인간의 내적 심층에 대한 새롭고 넓은 시야가 열렸다. 그리하여 인간이라는 괴물의 정체가 더 잘 설명될 만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더욱 더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가 눈 앞에 열림으로써,예술가는 자신의 감수성과 통찰력을 구사하여 프로이드가 발견한 마음의 비밀을 자기들 나름으로 또한 찾아내고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1차 대전 후의 새로운 심리주의 작가들은 이 방법을 빌려서 이른바 의식의 흐름의 문학을 만들어 냈다. 즉 현실을 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종래의 평면적인 묘사 방법을 탈피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학은 물론 미술의 영역에까지 가장 현대적인 주장의 하나로 지목될 수 있는 초현실주의도 심층 심리학의 영향 아래 생겨났다. 그것이 주장한 바는 조화나 비례,리듬 같은 19세기적 밝은 세계의 미학 원리를 배제하고 그 대신 무의식 세계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갖가지 형상을 통하여 자연스러운 미적 효과를 얻자는 데 있다. 초현실주의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사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와 심미적 윤리성과 선입견 없이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을 적을 따름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현실적 의식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 연상,또는 꿈이나 상상 같은 비합리성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초현실적 차원으로 대상을 옮기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현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길로 흐르는 것은 필연이며,기존의 가치를 증오와 모멸의 대상으로밖에는 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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